[김문술의 역사기행] ‘학성’이라는 지명과 미역바위

김문술 / 기사승인 : 2015-09-17 16: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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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바위

북구 판지 마을 앞바다에 있는 양반돌




울산 고을의 또 다른 이름은 ‘학성’이다. 지금도 울산에는 학교, 다리, 동(洞) 등 여러 곳에 ‘학성’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학성’이라는 이름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학성’은 신령스런 학이 내려앉은 자리에 있는 성(城)이라는 뜻의 ‘신학성(神鶴城)’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학이 내려앉은 곳에 자리를 잡은 신학성은 중구 학성동 울산 MBC 방송국이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신학성에 터를 잡고 이 지방을 통치했던 인물은 박윤웅이었다. 울산 박씨 시조가 되기도 하는 그는 신라가 멸망할 무렵 온 나라가 혼란에 휩쓸렸을 때 이 지방을 통솔했던 호족이다. 그는 훗날 울산 지방의 수호신으로 신격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 말 나라가 쇠퇴하고 후삼국이 성립될 무렵 정세를 관망하던 박윤웅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 편에 서게 된다. 수도 경주와 이웃한 울산이 고려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힘이 된 것이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자 태조 왕건은 박윤웅의 공로에 보답하여 여러 가지 포상을 하게 된다.



우선 울산 지방을 흥려부로 승격시키고 지배권을 박윤웅에게 주었다. ‘흥려(興麗)’란 고려를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다. 박윤웅을 2등 공신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경제적 보상도 함께 이루어졌다. 북구 농소동 일대의 농토와 정자 앞바다 미역바위 12구를 하사하였다. ‘농소’는 박윤웅의 농장이라는 뜻이다.



지금 농소동에서 박윤웅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북구 구유동 판지마을 앞바다에 있는 미역바위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잘 전해주고 있다. 박윤웅이 소유권을 가졌던 미역바위는 조선후기부터 소유권자가 여러 번 바뀌게 된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울산에 와보니 그때까지도 울산 박씨 문중에서 이곳의 미역을 공물로 받고 있어 이를 나라에 환납토록 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미역바위는 3년 내내 흉작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12구의 미역바위 가운데 하나를 박씨 문중에 되돌려 주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다시 풍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는 일제강점기까지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였다. 해방 후 이 지역 어민들이 미역을 박씨 문중에 납부하지 않자 정부에 탄원하여 다시 문중 소유가 되었다. 5.16 군사 정변 후 수산업법이 개정되어 미역바위의 소유권이 마을 주민들에게 넘어가자 울산 박씨 문중에서 크게 반발하여 중앙 관청 및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밀양 박씨)이 직접 개입하여 미역바위에 대한 채취권을 일부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이 비석이 “고려 원훈 흥려백 시장무 박공윤웅 채암비(高麗 元勳 興麗伯 諡莊武 朴公允雄 采巖碑)”이다. 그러나 1979년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어민들과 문중의 미역바위 쟁탈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작황에 따라 1~4단을 박윤웅 제사용으로 바치기로 합의하였다.



미역바위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2003년에 건립한 것이 바닷가 쪽 비석이다. 이 비석은 “장무공 박윤웅 곽암 사적비(莊武公 朴允雄 藿巖 事蹟碑)”이다. 비석의 삼면에는 한글로 박윤웅의 등장부터 미역바위에 얽힌 역사와 소유권 쟁탈전, 그 결과 문중이 승리했음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미역바위를 둘러싼 긴 갈등이 일단락 된 셈이다.



‘양반돌’ 혹은 ‘윤웅바위’로도 불리는 미역바위의 권리를 1천년 동안 유지하고 있는 박씨 문중의 끈질긴 노력도 대단하다. 지금은 미역바위를 포함한 이 지역 전체의 미역 생산을 어촌계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석


1966년 세워진 박윤웅 채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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