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전차 (雨前차)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 기사승인 : 2021-10-18 00: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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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나는 십여 년 전에 친구의 권유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관련 교육을 수강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류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고 또 그 흐름을 직접 봐왔기에 한국어 교육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러운 한편 늘 신기하기도 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미용 산업, 음식까지 해외에서 우리 문화의 인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그것이 일부에 국한된 것이며 진정한 세계의 중심이 되기에는 멀었다는 자성의 목소리에 금세 현실을 자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김구 선생이 그토록 소원했던 문화의 힘에 대해 체감하고 있다. 특히 최근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의 세계적인 열풍은 ‘혹시 나만 모르는 몰래카메라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세고 뜨겁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한국의 옛 놀이를 따라 하고 인증하기 바쁘다.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결코 갑자기 맥락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간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시간이 쌓인 결과이겠지만, 돌이켜보면 그 문화의 힘이 이렇게 꽃피울 수 있었던 원천에는 ‘언어’가 있지 않을까.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덕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글날 575돌을 맞는 뜻깊은 10월,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움에 취해 아껴두었던 차를 꺼냈다.

지리산 야생 우전


마른 찻잎에서부터 풋풋한 새싹의 향기. 여린 싹의 풀 내음은 달곰하면서 고소하다. 한 김 식힌 물로 짧게 우려내어 찻잔을 손에 쥐면, 찻물의 빛깔이 마치 달빛처럼 찰랑거린다. 이른 봄의 들판, 맑은 하늘 보름달. 한 걸음 뗄 때마다 젖은 풀잎들이 내 뿜는 달콤한 숲의 향기. 잠시 후 불어오는 바람에 혀에서 청보리의 푸르름이 느껴진다. 달빛 아래 드러나는 작은 들꽃들 멀리서 불어오는 곡식의 향기. 숲속 작은 돌 틈으로 솟아나는 샘물. 작고 여린 것들이 내뿜는 강한 생명력의 빛깔과 향기들.

참 예쁘고 아름다운 차다. 평생 단 한 가지 차만 마셔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우전 녹차를 선택할 것이다. 여리면서도 강하고 단아하면서도 화려하다. 흐릿한 듯하면서도 진하고 복잡하다. 


많은 농작물이 그러하듯 찻잎 역시 나고 자란 땅의 특성을 품고 있다. 찻물의 빛깔부터 여리고 심심할 것 같지만 그 안에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고 대담하고 역동성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때로 이 아름다운 차를 꼭꼭 숨겨두고 나만 알았으면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너무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면 이 재미를 같이 나눌 사람이 간절한 법, 이토록 아름답고 재미진 차를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녹차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전을 잘 모른다. 정말 잘 만든 꿀잼 드라마인데 시청률이 안 나오는 것과 같다. 대중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재미를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그 전에 먼저 시청률 부진으로 인한 조기 종영을 걱정할 판이다. 우리 녹차의 세계진출을 꿈꾸기 이전에 국내 인지도부터 걱정해야 한다. 


2009년 ‘한국음식세계화추진단’이 출범하면서, 김치와 불고기를 이을 다음 세대 한식 세계화 주자로 떡볶이를 내세웠다. 하지만 ‘떡볶이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기 어렵다’던 어느 음식 평론가의 말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떡볶이는 한국의 국민 간식, 대표 길거리 음식으로 인식돼, 한국문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꼭 먹어야 할 필수템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이 즐기고, 내 아이돌이 최애 음식으로 꼽는 떡볶이는 자연스럽게 먹어보고 싶고, 먹어보니 다시 찾게 되고, 다시 찾다 보니 내 일상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전에는 이러한 문화적인 이해와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음식 자체만으로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물론 큰 성과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권유하지 않는데도 먼저 찾아보고 시도하고 즐긴다. 그것은 음식의 바탕에 깔린 문화적 이해와 서사가 선행됐기 때문이다. 지금 다방면으로 우리 문화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가고 있다. 부러 세계화에 대한 부분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미 조건이 충족된 셈이다.


세계 사람들은 이제 진짜로 우리가 누리는 문화들을 체험하고 같이 누리고 싶어 한다. 과거 우리가 그들의 문화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무엇이든 수요가 있어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즐기지 않는 것은 세계인들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너무나도 잘 만든 훌륭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도 다양한 이유로 시청률이 저조할 수 있다. 작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우리 차 역시 그런 드라마와 같다고 생각된다. 수작 중의 수작이나 시도부터 어려운 장르물 같은 느낌이다. 큰 줄기에서 보면 우전은 대중성이 너무 떨어진다. 가격 때문에 쉽사리 시도해보기 어렵고 고루한 옛것, 예법을 중시하는 어려운 이미지 때문에 일상적이지 않다. 좀 더 작은 줄기에서 보면, 차 제품군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상품으로서 매력이 부족하며 접근할 수 있는 채널이 모자라다.


가격 부분은 한국 녹차 산업의 척박함이나 차 생산과정을 생각한다면 결코 비싸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 차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차에 대해 홍차는 40%, 녹차는 무려 513%의 관세를 매기고 있는데도 수입차가 더 저렴하다. 차 산지 자체의 생산력, 생산방법, 유통구조 등 다양한 차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차를 소비하는 문화와 그에 따른 수요에서부터 그 차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수요가 많으니 생산량이 늘어나고 가격경쟁력도 생기며 다양한 수요의 만족을 위해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다채로운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다 보니 산업을 넘어 문화적 저변이 확대된다. 이는 다시 수요로 이어지는 순환구조를 갖게 된다. 현재 한국 차 산업 환경에서 어느 한 부분의 노력이나 개선만으로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돌파구는 있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 백성의 소통을 위해 우리 말에 맞게 만들어진 한글이 세계인이 먼저 배우고자 하는 글이 된 것처럼, 우리 녹차도 먼저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차가 됐으면 좋겠다.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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