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앞에 서면

김윤경 글 쓰는 엄마 / 기사승인 : 2020-12-24 00: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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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일기

둘째가 자기 전에 편지를 써서 주곤 한다. 한글을 몰라도 사랑만은 꾹꾹 담아 편지를 쓴다. 색종이나 손바닥만 한 종이를 찾아 마스킹테이프를 장식으로 붙인다. 자기가 그릴 수 있는 걸 총동원한다. 하트, 집, 사람, 구름, 아이스크림을 그린다. 전에는 사람을 눈사람처럼 그렸는데 이제 제법 그럴듯하게 그린다. 정성스럽게 여러 번 꼬깃꼬깃 접는다. 겉에는 이름을 적듯이 끄적인다. “자~ 엄마 편지야~”하고 뿌듯한 미소로 건네준다. 그럴 때 마음이 녹는다. 아마 언니가 뭘 적어서 우리한테 주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것 같다. 


첫째가 한창 편지를 써서 주더니 요즘엔 효도쿠폰을 만들어서 준다. 친절하게 유통기한은 쓰고 싶을 때까지다. 효도쿠폰 내용이 알차다. 무려 여섯 가지를 담았다. 소개하자면 ‘안마 2분은 시원해질 때까지, 시키는 심부름 싹 다 해드립니다, 집이 깨끗해서 빛이 나도록 정리하기, 그릇이 너무 깨끗할 만큼 편식 안 하기, 짜증 안 내고 덤으로 진상 안 부리기, 뽀뽀해주고 덤으로 안아주기’다. 쿠폰마다 웃음 짓게 하는 그림도 그렸다. 이런 게 자식 키우는 재미다.


첫째는 소원이 세 가지다. 그중 한 가지가 이루어졌다. 학교 안 가는 날이 가는 날보다 많아지면 좋겠다더니 3분의 1 등교마저 전면원격수업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학교를 가면 안 가고 싶어 하고 안 가게 되면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첫째는 주말이 5일이고 평일이 2일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른다. 나머지 소원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단 거 많이 먹어도 이 안 썩게 해주세요’, ‘울산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나게 해주세요’. 첫째는 이 사이가 좁아서 잘 썩는다. 양치 후에 치실을 꼭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해도 이 사이에 구멍이 나 있다. 


애들이 부르는 울산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고 경산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다. 첫째가 소원 세 가지 중에 가장 바라는 게 울산 할아버지가 살아나는 거다. 돌아가신 지 두 달 반 정도 지났다. 아빠의 휴대폰 번호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쓴다. 엄마는 요양보호사학원에 다니느라 바쁘시다. 바쁘신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친정에 들를 때마다 아빠의 물건이 없어지면서도 나타난다. 입원하시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조경기능사 공부를 했던 아빠의 유작이 발견됐다. 아빠의 그림 실력과 꼼꼼함이 녹아있어 한눈에 봐도 훌륭한 조경설계도면이었다. 


요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겪어내고 있다”고 대답한다. 올 한해를 되돌아보면 코로나보다 아빠가 돌아가신 게 가장 크다. 아빠가 아득하게 멀리 느껴지는데 고작 두 달 반밖에 안 됐다니 얼떨떨하다. 아빠가 정리되는 속도는 이렇게 빠른데 석 달 전만 해도 돌아가실 줄 몰랐다니 허망하다. 솔직히 다른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었다. 예상치 않았는데 아빠 이야기로 전개됐다. 쓰면서도 기분이 이상하다. 일상은 아빠를 애도할 틈이 잘 없다. 글을 쓰려고 호젓이 앉았을 때야 아빠를 가만가만 떠올린다. 그래서 글을 뭘로 시작하든 아빠 이야기로 매듭이 지어지나 보다. 


아이들 장난감을 정리하다가도 아빠가 사준 게 눈에 밟힌다. 애들 데리고 문방구나 슈퍼에 가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씩 고르라고 했던 아빠다. 주말이면 애들 뭐하냐고 일정 없으면 놀러 오라고 문자 보냈던 아빠다. 돌아보니 아빠가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부터 애들을 찾는 연락이 없었다. 그만큼 힘드셨던 건데 나는 둔했던 건지 둔한 척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아빠 생전에도 할아버지 생신에는 첫째가 편지를 써서 드렸다. 더 사셨다면 둘째 편지도 받아봤을 텐데 말이다. 아직 손주들의 예쁜 모습들이 많아 남았는데 보질 못하니 아쉽다. 글 앞에 서면 아빠 생각이 난다. 


김윤경 글 쓰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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