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고

이해규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회원 / 기사승인 : 2021-10-19 00: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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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유고 시집은 2008년 그가 타계한 바로 그해 딸 김영주에 의해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혀오고 있다. <토지>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 대부분이 장편소설이라 솔직히 읽기가 부담스러운데 시집을 통해서 작자의 문학세계와 삶의 지혜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소개하는 유고 시집은 특히 삶의 덧없음과 인간성의 타락, 문명에 대한 비판, 생명을 사랑하는 그의 절절한 마음이 녹아있다. 


원래 박경리는 소설가보다 시인이 되고자 했는데 처음에는 시를 많이 쓰다가 나중에 김동리에 의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시를 써왔기 때문에 생전에 그가 공식 출간한 시집도 5권 정도 된다. 


박경리는 생전에 “내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어릴 때 두 집 살림을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마음, 6.25 때 좌익분자로 몰려서 죽은 남편과의 사별, 지독한 생활고 그리고 아들을 열 살 때 병으로 잃은 일, 인생 후반기에는 사위였던 저항시인 김지하의 감옥 생활 때문에 가족들이 온갖 고초에 시달렸던 일 등, 그의 삶은 참으로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됐다. 역설적으로 그의 문학작품은 이런 상황 속에서 꽃피웠다. 


나는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같은 그의 작품을 여러 편 읽었는데 체험적 삶에 기반한 리얼리즘과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담대하고도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의 유고 시집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폐암으로 인한 죽음을 앞두고 쓴 유고 시집은 삶의 종착점에서 지난날의 회상과 삶에 대한 관조, 더 나아가 인간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주로 담고 있다. 시는 미사여구나 은유, 상징을 배제하고 직설적 산문체로서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잠깐이지만 그의 시 세계로 떠나보자. 시집 전반부에는 지나온 80년의 세월에 대한 회상과 모친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산다는 것’,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 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천성’, ‘어머니’에서는 꿈속에서 나타난 모친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묘사되고 있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시집의 후반부는 주로 삶에 대한 성찰과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 시가 채워져 있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맹이와 다를 바 없다…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사람 됨됨이’. 다른 시에서는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어서 간담이 서늘해진다. “음식이 썩어나고 음식 쓰레기가 연간 수천억이라지만 비닐에 꽁꽁 싸이고 또 땅에 묻히고 배고픈 새들 짐승들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이라 아아 풍요로움의 비정함이여”-‘까치설’, “아아 굶주림 같은 풍요로움이여 쓰레기 더미 같은 풍요로움이여 죽음에 이르는 풍요로움이여 눈물이 배어들 땅 한 치가 없네”-‘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 “사람아 사람아 제일 큰 은총을 받고도 가장 죄가 많은 사람아 오늘도 어느 골짜기에서 떼죽음 당하는 생명들의 아우성 들려오는 듯…”-‘넋」’.


박경리의 유고 시집에서 한 문학가의 기나긴 삶의 여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엿보인다. 틀에 박힌 일상과 말초적 쾌락, 욕망에 젖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다시금 삶을 되돌아보면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을 던져준다. 작품의 후반부 문명 비판 시를 읽으며 작가의 허무한 넋두리를 들었으나 넋두리의 끝은 감정의 정화였다. 작자는 허무주의를 넘어서 인간과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 ‘확신’이라는 시에는 “오로지 땅을 갈고 물과 대기를 정화하고 불사르어 몸 데우고 밥을 지어 대지에 입 맞추며 겸손하게 감사하는 의식이야말로 옳고 그르고가 없는 본성의 세계가 아닐까”라며 사랑과 겸양의 미학을 설파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깊은 가을밤 각자의 책장에 묵혀있던 오래된 시집을 한 권 꺼내 읽으면서 우리 안의 무디어진 감수성을 다시금 살려내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보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이해규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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