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장미가 예쁜 날에 비가 내린다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21-05-24 00: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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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상

종일 비다. 이런 날엔 누가 뭐래도 영화 한 편은 봐줘야지. 가까운 지인을 불러 차 한 잔으로 마음을 데운 후 우리는 영화의 전당으로 달린다. 모처럼 일탈이다. 한 손엔 커피를 들고 한 손엔 스카프를 날리며 잠시 우리는 철없는 스무 살이 되기로 한다. 영화는 플로리앙 젤러 감독의 <더 파더>다. 앤서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먼이 출연하는 영화다. 우리는 조금 일찍 도착해 표를 예약하고 여유 있게 수영강을 내려다본다. 낭만적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다. 그리고 시간대가 한낮이어서 그런지 중년 여성이 많다. 무료한 일상이 화면 속에서 펼쳐진다. 음악을 듣는 앤서니는 어깨가 축 처진 노인이다. 특별할 것도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는 방안에 햇살이 비친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면 커튼은 살랑거리고 앤서니는 딸깍하는 문소리에 거실로 향한다. 거실엔 젊은 남자가 앉아 신문을 읽는다. 누구신지? 처음 본 사람을 향해 당황해하는 앤서니. 남자는 앤(딸)의 남자 친구이며 자신은 폴이라 소개한다. 여기서부터 앤서니의 뇌는 복잡해진다. 분명 자신의 딸 앤은 파리로 떠날 거라 했는데, 이 남자가 앤의 남자 친구라니. 혼란에 빠진 앤서니는 그럴 리가 없다 말하지만 남자는 이 집은 자신의 집이며 앤서니가 딸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라 우긴다. 당황해하는 앤서니를 보며 폴은 앤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아버지가 많이 아픈 것 같다고 말한다. 장바구니를 들고 허겁지겁 들어서는 사람은 낯설다. 딸 앤이 아니다. 너무 당황한 앤서니는 자신이 평생 이 집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저 사람들이 누군지 낯설어 혼란에 빠진다.


처음부터 영화는 관객을 긴장시킨다. 앤서니의 말처럼 정말 이 집은 앤서니의 집인데 딸이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치매를 앓고 있는 앤서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겪는 혼란인지. 보는 사람도 뇌가 엉키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언제 어느 때 저런 일을 겪게 될지. 우린 아무도 모른다. 아직 젊었다고 생각되는 지금도 매번 깜빡 잊어버리는 일들이 많은데.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영화가 끝나갈 때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다. 앤서니는 간병인 로라를 만날 땐 유쾌하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고 재미있는 사람인지 증명해 보인다. 아직 멀쩡한데 왜 간병인을 자꾸 두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로사에게 말한다. 로사를 보고 그토록 사랑했던 둘째 딸 루사의 안부를 궁금해하지만 루사는 사고로 죽었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앤서니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아끼는 시계를 간병인이 훔쳐 갔다고 우겨 보지만 앤은 늘 아버지가 두는 장소를 말해 준다. 앤서니는 시계에 집착하고 시계는 자주 손목을 벗어난다. 여기서 시계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깊다. 앤서니가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천천히 되돌려 보면 큰딸 앤은 혼자 아버지를 보살피다 새로운 남자 친구 폴을 만나 파리로 떠난다. 아버지를 요양시설에 보내기 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게도 했지만 간병인을 거부하는 앤서니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앤은 결국 아버지를 입원시킨다. 앤서니는 자신의 집에 둘째 딸이 그린 그림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곳이 집이 아닌 병원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는 간병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운다. 


“내 잎사귀가 다 떨어진 것 같아”. 


이 대사 앞에서 사람들은 울음을 터트린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갑자기 우리 모두가 바스라진 꽃잎 같아서 눈시울을 적신다. 돌아오는 길과 길 사이 풍경은 갈라지고 우리는 철없이 흩날린 스카프의 장례를 치르고 만다.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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