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일기] 짜증이 짜증난다

김윤경 글 쓰는 엄마 / 기사승인 : 2022-06-22 00: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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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사선치료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총 27번 중에 12번은 뇌와 척추를 같이 치료했다. 뇌간에 남아있는 수모세포종이 뇌척수액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척추도 같이 치료할 때는 내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밥도 겨우 3숟갈 먹고 종종 토했다. 지금은 머리만 치료하니까 밥도 한결 잘 먹고 구토가 현저히 줄었다. 아프기 전과 컨디션이 비슷한 수준이다. 놀이터에서 구경만 하던 아이가 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삭발 이후 모자를 쓰고 다닌다. 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안 벗는다. 놀이터나 기차 안, 식당에서는 곧잘 벗는다. 사람들이 그닥 신경 안 쓴다는 걸 경험한 뒤로는 더 자유롭게 벗는다. 군데군데 짧은 머리카락이 남아 있어서 자칭 선인장 대머리다.


어느 날, 아이가 숙소에서 할리갈리 보드게임을 하자고 꺼내 왔다. 아이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봐주길 바랐다. 나는 처음에는 봐주다가 뒤로 갈수록 안 봐줬다. 결국 내가 이겼다. 아이는 화를 내며 종과 카드를 발로 찼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를 향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야~!”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거실이었고 방마다 환자가 있으니까 난감했다. 일단 문이 열려있던 방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문을 닫았다. 부릅뜬 눈과 중저음으로 급한 불부터 끄고 자리를 정리하고는 후다닥 숙소를 나왔다. 아이와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이대로는 숙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2차전, 3차전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냥 져줄 걸 괜히 이겼다.


큰아이도 울면서 보드게임을 익혔다. 나는 상대가 아이라고 안 봐준다. 미리 게임 시작 전에 선포한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정정당당하게 하자.” 계속 지니까 아이는 분해서 운다. 그러다가 실력이 늘어서 끝에 이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는 같이 기뻐해 준다. 그렇게 실력이 쌓인 아이는 나한테 온다. “아빠는 계속 봐주니까 게임하면 재미가 없어. 엄마랑 할래.”


작은 아이는 폭발적으로 화를 낸다. 큰아이 때처럼 적용하면 안 되겠다. 엄마의 승부욕은 고이고이 접어두고 져주는 연기가 필요하다. 할리갈리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숙소에서 “어쩜 아이가 저렇게 조용하고 순하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낯을 가려서 그렇다. 아이의 고함 소리를 듣고 아마 숙소 사람들이 놀랐을 거다. 안방 보호자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게임할 때 져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반성한다. 아픈 아이 상대로 내가 뭐 했나 싶다.


부쩍 아이의 짜증이 늘었다. 특히 식사 시간에 심하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하니까 아이와 갈등을 겪는다. 어떤 때는 치료고 뭐고 간에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서로 마음을 모아도 힘든 판국에 저리 짜증을 내니까 힘이 쭉 빠진다. 숙소에 있는 엄마들이 아침에는 “오구 내 새끼” 하다가 저녁에는 “이놈의 새끼!”로 바뀐다. 처음에는 살벌하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공감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참을 인’을 새긴다.


“엄마는 너랑 지내기 힘드니까 다음 주에는 아빠랑 올라와라.”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가 눈만 깜빡이며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럼 티브이에 300번부터 만화 한다는 건 엄마가 아빠한테 꼭 말해줘야 해. 나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지? 저녁 시간에 캐치티니핑 한다는 것도 말해줘. 나는 엄마나 아빠나 상관없어.” 아이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고 숙소에는 있으니까 아이가 내심 숙소를 좋아한다. 캐치티니핑을 보는 게 일과 중 아이의 가장 큰 기쁨이다. 할리갈리에서 이긴 게 무색할 만큼 캐치티니핑에 완패다.


김윤경 글 쓰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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