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소년회 창립 100주년 기념] 소년운동은 미래세대를 위한 운동이었다 - 일제식민시대 언양, 울산지역 소년운동사(1)

이병길 작가, 울산민예총 감사 / 기사승인 : 2022-06-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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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운동은 미래운동이다

1920년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왕성하게 민족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다.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2022년 올해는 어린이날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2년 10월 언양에서 언양소년회[단]가 창립한 지 100주년이다. 이 글은 언양소년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울산지역과 언양지역 소년운동 역사를 당시 신문보도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이다. 당시 보도량이 울산지역에 비해 언양지역이 많다. 따라서 이 글은 언양지역 중심의 소년운동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어린이는 미래의 어른이자 현재의 미래인이다. 조선 역사에서 어린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교적 국가는 위계적이고 계급적이고 남녀 차별적이고 장유유서의 수직적 인간관계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한국 사상사에서 경천동지할 새로운 사상이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펼쳐졌다.


“사람을 한울님같이 모시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을 강조한 동학(천도교)사상이 등장하면서 만민평등의 인간 존중 사상이 조선인들의 오랜 사상을 깨뜨렸다. 사람이 하늘과 같이 존중돼야 한다. 남자와 여자, 양반과 노비, 어른과 아이의 차별이 사라지는 대동 사회를 꿈꾸는 시대가 도래했다.


1919년 3월 독립 만세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국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독립운동의 구심 역할을 도모했다. 국내에서는 일제 식민 통치 방식의 변화로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소년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이 본격 시작됐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사상단체들도 결성돼 활동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은 민중의 계몽과 조직화로 민족해방운동의 부흥기와 황금기를 맞이했다.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민족의 자각에 따른 어린이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됐다. ‘어린이’란 개념이 1920년 식민지 조선 사회에 처음 등장했다. 일제 식민지가 된 지 10여 년 만에 어린이가 사람으로 온전히 대접받는 계기가 생겼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소년단체가 생기고 마침내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했다. 1930년까지 식민지 조선은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린이(소년) 운동의 황금기였다.


어린이는 다만 천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존재가 되었다. 어린이는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어른이 된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일의 조선의 일꾼 소년·소녀들을 잘 키우고자 하는 의식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한국 근대 소년운동사는 단순한 소년운동의 임무뿐만 아니라 민족 독립을 위한 최후 보루(堡壘)로서 소년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전개한 민족운동의 전위운동이다. 그러나 소년운동은 일사불란하게 활성화만 된 것은 아니고 내적으로 끊임없는 난관에 부딪히며 전개한 전위운동이었다.”


경성(서울)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에 따른 소년운동의 갈등이 있었다. 1920년대 울산 언양지역 소년운동의 역사도 그 영향권 안에 있었지만, 그 갈등은 첨예화돼 나타나지 않았다. 갈등은 언제나 변화와 발전과 함께한다. 중앙과 지역의 소년운동은 차이가 있었다. 지역은 지역 소년을 위한 운동에 매진했다.


울산지역의 소년운동은 영남산무리가 있는 언양지역에서 가장 활발했다. 당시 언양은 울산과 다소 지리적 역사적 거리감 때문에 1920년대까지는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부터 언양지역의 활동이 주춤해지면서 울산지역 중심으로 각종 사회운동이 진행됐다. 언양지역의 소년운동은 애국 계몽, 실력양성에서 시작해 항일운동으로 전개됐다.

어린이 운동의 사상적 시원, 동학사상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음력) 경상북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 용담정에서 동학을 창도하고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들었다. 동학은 기존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봉건적 조선 사회를 극복하고, 서세동점의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고자 한 근대적 사상이며 민중 신앙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후천개벽 사상이었다. 동학의 창도는 한국 근대 사상과 가치관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최제우는 민족주의적 관점에 있었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 침략에 매우 강력한 적개심을 나타내며 ‘개 같은 왜적 놈’이라고 표현했다. 최제우는 만일 그가 죽은 후에 일본이 재침략하는 일이 있으면 영혼이 돼서라도 이 ‘개 같은 왜적 놈’을 하룻밤 사이에 멸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용담유사(龍潭遺詞)>의 ‘안심가(安心歌)’로 노래했다. 그 후 모든 동학도가 이 노래를 불렀다. 동학은 일본의 재침략에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적 민족주의 사상을 가졌다.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은 바로 이러한 동학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며, ‘사람(人)’의 마음속에 ‘한울(天)’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이제 사람은 한울님이니 이 한울님은 신분·계급·남녀·노소·빈부에 전혀 차별 없이 모두 똑같은 한울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으로 인격적으로 평등하다. 임금이나 노비나 같다는 만민평등, 인간 존중의 사상은 반봉건주의 사상이었다. 동학은 조선사회에 변혁적 기운을 불어넣고 후천개벽을 부르짖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6.2.)은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 것(以天食天)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한울님을 잘 길러나가는 것(養天主)이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오 한울님이 곧 사람이다.”라는 ‘인시천(人是天)’사상을 정립해 “사람 섬기기를 하나님같이 하라(事人如天).”고 했다. 그는 여성도 ‘하나님을 낳는 하나님’이라고 하여 남녀평등을 강조했으며, 어린이는 ‘어린 하나님’이라고 하여 어린이 존중을 강조했다. 특히 “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내수도문’)라고 했다. 이 한 구절이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에 대한 관점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천도교의 개벽 사상이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위대한 사상의 혁명이 시작됐다.


최제우의 사상에 감응한 사람이 소춘 김기전(1894~1948?)이다. 그는 1920년 <개벽>지 창간호에 “다수 인민이 갈앙(渴仰)하고 또 요구하는 소리는 곧 신이 갈앙하고 요구하는 소리니 곧 세계 개벽의 소리로다.”라고 했다. 그는 “조선인은 어른이 사람인 줄은 잘 알되 어린애도 같은 사람인 줄 모른다”며 장유유서의 수직적 인간관계와 아동 인권을 짓밟는 유교를 비판했다. 또한 어린이들이 인간 중 가장 최하위에서 윤리적 압박과 궁핍을 면하기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제적 압박에 짓눌려있다고 보고 ‘사인여천’의 인간해방을 강조했다. 나아가 어린이에게 높임말을 사용할 것과, 양생 토양 만들기, 남녀 차별 해소를 주장했다. 당시 천도교 이론가인 이돈화(1884~1950) 역시 어린이의 인권은 보장되고 또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교의 윤리와 도덕은 소년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사회적 지위나 예의라고는 털끝만치도 주지 않았다.”며 유교적 수직적 인간관계를 비판하고 수평적 인격적 인간관계를 어린이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천도교 사상가들은 어린이가 신조선을 이끌어나갈 역량을 갖춘 신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개조를 통한 자주 자립적 인간의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보았다. 그 신인간이 바로 어린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 조직이 요구됐다.
 

▲ 사형 직전의 최시형. 보따리 하나 들고 사인여천, 만민평등의 인간해방 사상을 펼치며 살았던 한울님이다.

방정환과 천도교소년회

1920년경 안변소년회, 왜관소년회, 진주소년회 등이 지방에서 태동했다. 조선 소년운동을 일으킨 소년 역사가 시작됐다. 특히 1920년 8월 강민호 등 30여 명이 발기해여 20세 이하 청년 학생으로 조직된 진주소년회(晉州少年會)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기회를 보아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며 독립 만세운동을 하려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 소년운동의 첫 봉화(烽火)였다. “소년 자신을 주체로 한 사회적 의의를 가진 운동”으로 “소년회를 위한 소년회가 아니고 어린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한 소년의 자발적 독립운동단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대단히 높다. 진주소년회의 독립운동은 천도교소년회의 계몽운동과는 달랐다.


1920년대 천도교는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천도교 청년회와 소년회는 일제 식민시대 청년 소년운동의 주역이었다. 기미년 만세운동 후 천도교는 혹독한 탄압을 딛고, 1920년 4월 25일 천도교청년회를 결성했다. 청년회는 문화운동의 이념을 생산 전파하는 신문화 선전의 봉화 역할 뿐만 아니라, 이를 구현하기 위한 문화운동에 솔선수범했다. 특히 당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어린이(소년)를 대상으로 하는 소년운동을 시작했다.

 

 

▲ 어린이 해방운동을 펼쳤던 소전 김기전과 소파 방정환

방정환은 1920년 8월에 발행된 <개벽> 3호에 실은 번역 동시 ‘어린이의 노래’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어린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인격을 부여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 2000년 12월 20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세운 ‘세계 어린운동 발상지’ 기념비

이병길 작가, 지역사연구가, 울산민예총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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