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양산지역사도서관 공동기획] 취성천과 작괘천은 삼남읍을 에워싸고 흐른다 - 향토사 주제답사(13)

글 김진곤 울산양산지역사도서관 관장,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 / 기사승인 : 2022-06-22 00: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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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 언양향교

언양향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산읍지>(1934년)에 “처음 읍성 북쪽 2리 반월산 아래에 있다가 덕천으로 옮겨 세웠고, 다시 화장산 아래로 옮겼다가 지금은 교동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694년 지역 유림이 성금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착공해 1696년 대성전을 완공했고, 1700년에는 명륜당을 지었다. 1748년에 태풍 피해로 현감 장제상이 중수했고, 10년 뒤 현감 김천상이 다시 중수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형에 따라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에 동향으로 배치돼 있다.
 

▲ 언양향교

 

빼어난 경관에 민관이 함께 만든 작천정

1895년 언양현감으로 부임한 정긍조가 지역 선비들을 작괘천(酌掛川)으로 초대해 시회(詩會)를 열었다. 정 현감은 시회를 마친 후 노소동락모임인 시계(詩契, 1887년 결성)를 헌산시사(巘山詩社)로 개편하고 성금을 모아 정자를 건립하자고 제의(提議)했다. 참석한 선비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바로 짓지는 못했다. 그 후 1899년 언양군수로 온 최시명이 1900년 관비(官費)로 토지를 구입한 뒤 성금을 모아 정자를 짓기 시작해 1902년 7월 준공했다. 이후 몇 차례 중수가 있었고, 지금의 건물은 2005년 중건한 모습이다. 상량문은 언양 문인 송종서가 썼고, 최 군수가 ‘작천정’이라 지었으며, 현판은 조선말 친일서예가 김성근(金聲根)이 썼다. 정자에는 상량문, 기문, 한시 등이 걸려 있다.

 

▲ 작천정 앞에서 답사회 회원들


지역 역사와 시(詩)가 숨어 있는 작괘천

작괘천(酌掛川)은 너럭바위가 오랜 세월의 물살에 깎여 움푹 파인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 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도읍지> 언양현(1832년)에도 ‘작괘천’으로 기록돼 있다. 작괘천은 고려 충신 정몽주 선생이 글을 읽고, 고을 수령과 지역 향반들이 오래전부터 경치를 즐기면서 한시(漢詩)를 짓는 등 풍류를 즐긴 장소다. 특히 이곳은 언양 3.1 만세운동과 지역 청년회 활동의 근거지였다. 바위에 인내천, 모은대, 모은대기, 모은대추술, 선무원종공신, 헌산시사(巘山詩社), 청사대(靑史臺), 김홍조, 이구소, 오병선, 김찬희, 송종서 등 320여 개 이상의 명문(銘文)이 있다.

 

▲ 작괘천


작괘천에 흐르는 애민 정신, 김찬희 시은(施恩) 송덕비와 명문(銘文)

김찬희(1880~1950)는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화천마을에서 태어났다. 4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은 2대 상북면장(1936~1945)을 지낸 김교완이다. 광복 직후에 상북면에서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재촌(在村) 지주는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했던 석남사를 포함해 16명이고, 그중 등억리가 7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찬희는 두 번째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김교완도 함께 포함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상북면 극빈자들의 호세(戶稅)를 대신 납부하고, 춘추로 휼빈소(恤貧所)를 설치해 가난한 주민들을 도와줬다. 1922년 울주군 상북면 사립양정학원 설립에 1000원을, 1948년 언양중학교를 언양읍 어음리로 이전할 때 토지 대금으로 약 120만 원을 각각 기부했다.
1930년 6월 향인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시은송덕비를 세웠다. 작천정 서쪽 작괘천의 거대한 바위에는 그와 아들들의 이름을 함께 새겨놓았다.

 

▲ 작괘천 명문

 

광복 후에도 교육 시설인 중남초등학교 작천분교장으로 이어진 언양심상소학교(彦陽尋常小學校)

이 학교를 인근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언양과 삼남에 거주하던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소학교라고 하여 일인학교(日人學校), 왜인학교(倭人學校)라고 불렀다. 이곳은 삼남읍 교동리 화남정마을에 덕천고개와 잇대어 있었는데, 소재지가 당시 삼남면 교동리로 기록돼 언양심상소학교로 추정되는 곳이다. 학교 인가 일자와 개교일은 알 수 없다. 당시 일본인은 28세대, 남녀 91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후 이곳에는 중남초등학교 작천분교장이 1946년 1월 8일 개설돼 1952년 12월 15일 폐교됐다.
한편 이곳에 천도교 신자들이 종교 활동을 했던 건물이 있었다는 일부 주민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천도교 언양 교구에 확인한 결과 예배와 행정 업무 등 종교 활동은 전혀 없었고, 다만 교구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건물을 임대했다고 한다.

부로산에서부터 쌍수마을까지 길게 이어진 진등(長嶝,陣嶝)

부로산에서 작괘천을 따라 덕천고개를 지나면 쌍수마을까지 엄청난 길이로 이어진 지형이 나온다. 이를 진등(長嶝)이라 한다. 또 옛날에 가야군과 대치했던 신라군이 진(陣)을 친 곳이라고 하여 진등(陣嶝)이라고도 일컫는다. 예전에는 이곳에 길게 이어진 산길로 신화리의 쌍수마을과 도호마을 주민들이 언양읍과 삼남읍으로 왕래했다.
 

▲ 진등

여름에 인근 어린이들이 다이빙하며 놀던 ‘푸릉바우[靑岩]’

평리의 진장마을에서 작괘천과 잇대어 현존하는 거대한 바위다. 이 바위는 푸른 빛을 전혀 띠지 않는데 그 아래 소(沼)가 깊어서 바위가 푸르게 보인다고 해 일컫는 지명이다. 예전에는 인근의 어린이들이 여름에 다이빙하며 즐겁게 놀던 곳이다.
▲ 푸릉바우

교세 약화와 이농 현상으로 1969년 폐쇄된 언양성당 ‘가천공소(加川公所)’

‘공소’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천주교건축물을 일컫는다. 가천공소는 현재 삼남읍 반구대로 345에 있었던 공소로 김영제(요한) 신부 시절인 1957년 공소 건물이 설립됐다. 초대 공소 회장은 이반석(바오로), 2대 회장은 이해용(바오로)이었다. 공소의 전성기는 이돈우(레오) 신부 시대인 1962년부터 1967년까지로 보며 신자 수는 40여 명 정도 됐다. 가천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신자가 매주 언양본당에서 미사참례를 하다가 가천 지역에 공소가 설립되면서 신자 수가 점점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농 현상이 일어나면서 교세가 약화돼 배상섭(요한) 신부 때인 1969년 4월 가천공소는 폐쇄됐다.

부침 거듭하다 결국 폐사된 간월사지

간월사지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 있는 간월사지석조여래좌상은 신흥사의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인조 12년에 명언(明彦)이 중건한 후 헌종 2년 이후 몇 차례 홍수로 폐사됐다. 지역민들이 이곳에 다시 중창했으나 폐허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헌산지> 등 여러 기록에 ‘肝月寺’, ‘澗月寺’, ‘肝越寺’ 등으로 한자의 표기가 서로 다르다.

 

▲ 간월사지

글 김진곤 울산양산지역사도서관 관장,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조은미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사진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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