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으로 쓴 문장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21-06-28 00: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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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상

사무실 문 앞에 휴대폰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잠긴 사무실 앞에 누군가 앉았다 간 것이 틀림없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폰을 들고 사무실 문을 연다. 사무실에는 허브장미가 한창이다. 허브장미의 꽃말은 ‘나의 마음은 그대만이 아네’라는데 정말 그대가 나의 마음을 알까? 혼자 웃다 커피 한 잔으로 폰의 주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 스쳐 지나간 건가 뒤돌아보지만 그냥 사람들만 보이는 거야 / 다 와가는 집 근처에서 괜히 핸드폰만 만지는 거야 / 한 번 연락해 볼까 용기 내 보지만 그냥 내 마음만 아쉬운 거야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정말 폰 주인이 어떻게 이런 가사의 노래를 외우고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이제 겨우 7살 먹은 아이인데. 준이는 요 근래 내가 새로 만난 친구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건지 어느 날 우리 사무실로 들어와 여기가 카페인지 묻는다. 나는 카페가 아니라 사무실이라고 알려 준 뒤 일하느라 그 아이가 사무실 앞에서 노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친구랑 마주 앉아 대화하는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아이들의 대화가 아니라 어른의 대화였다.


“난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아 슬퍼. 내가 죽어도 넌 계속 내 말을 듣지 않을 거잖아. 그러니까 슬퍼.”


무슨 꼬맹이들의 대화가 이렇게 슬퍼?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앉아 노는 문 앞으로 나가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 이후부터 시시때때로 우리 사무실에 쳐들어온다. 어느 때는 둘이서 어느 때는 준이 혼자서 찾아와 내 손을 잡아당긴다. 일이 바쁜 날에는 달래서 돌려보내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가끔 동화책도 읽어 주고 먹을 것도 챙겨 주며 같이 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린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준이는 참 똑똑한 친구인데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한다. 누구보다 어휘력이 뛰어나고 표현력도 좋은데 말이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서 놀다 갑자기 아이가 사라졌다. 장난감을 두고 어딜 갔는지. 오겠지 하고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준이가 나타났다. 집에 가서 머리를 감고 온 건지 샴푸 냄새가 난다. “준아, 머리 감고 온 거야?”하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머리를 감고 온 준이는 그날 내게 처음으로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라는 노래를 불러줬다. 가사를 또박또박 외워 노래하는 준이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린 아이인지 난 그때 알았다. 준이의 눈망울이 어쩌면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처음으로 난 엄지척을 해 주며 멋진 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래 답가로 동화책을 읽어 주며 어째서 아직 한글을 배우지 않았는지 물었다. 준이는 귓속에다 엄마가 중국 사람이어서 한글을 잘 모른다 했다. 그 말을 하고 난 뒤 조금 심각한 얼굴로 꼭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는 아이의 말에 난 가슴이 아팠다. 집에서 가족들이 엄마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갖고 있기에 아이가 엄마에 대해 위축돼 있는지.


준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나 혼자 준이라 부르고 있다. 가끔은 똥강아지라 부르기도 한다. 왜 자신이 똥강아지냐고 장난을 치면 넌 귀한 사람이라서, 너무 귀해 똥강아지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면 준이는 웃으며 내 앞에서 태권도도 시범 보이고 춤도 춘다. 어디서 이런 멋진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아이가 종일 골목을 서성거려도 우리 사무실에서 놀아도 부모는 아이를 찾지 않는다. 난 그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하루하루 눈빛이 맑아져 가는 아이를 보면 즐겁다. 어두웠던 아이가 과자를 사면 이제 가장 먼저 사무실로 달려와 사탕도 나눠주고 젤리도 나눠준다. 나눠주는 기쁨을 알아가는 준이. 덩달아 신이 난다.


어느 시인은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서사가 구름의 배반이라 말한다. 그깟 배반쯤이야. 기꺼이 구름이 되어 날아라. 가볍게 더 높이 더 멀리. 만날 때 서로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누군가에게 단비 같은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그러면 난 정말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을 느낄지 몰라.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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