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답사]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문수산(文殊山) 일대의 다섯 사찰을 찾아서 - 취선사, 문수사, 혁목암, 망해사, 영축사

조은미 시민,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 기사승인 : 2022-03-30 00: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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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향토사도서관 공동기획
향토사 주제답사(6)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에서 후삼국까지의 유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역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신화와 설화, 불교, 문학(향가) 등이 수록된 풍부한 문화 콘텐츠의 보고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울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찰이 열 곳인데 그중 다섯 곳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수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유사가 쓰인 고려시대까지 문수산 일대(문수산, 영축산, 남암산)는 ‘영축산’으로 불렸다.

 

 

▲ 진경산수화를 떠올리게 하는 남암산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옛터와 유물만 남은 곳과 흔적조차 없는 곳도 있다. 거듭되는 답사로 체득한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꼼꼼한 사전 공부는 필수다. 다섯 사찰의 발표를 답사회 회원들과 분담한 후, 임인년 첫봄 답사길에 나섰다.
▲ 대암호에서 취선사지의 추정위치를 확인하는 답사회원들

대암호 속 잠들어 있는 김유신 장군의 원찰(願刹) 취선사(鷲仙寺)

먼저 문수산 쪽에서 삼동면 둔기리를 지나 대암댐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 댐은 울산의 산업화가 진행되는 1969년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건설한 것으로, 댐으로 인해 하잠리, 구수리의 마을 일부가 수몰됐다. 울산박물관의 <문수산 일대 불교 유적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수몰된 지점 어딘가 취선사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취선사는 7~8세기에서 약 100년 동안 존속했던 사찰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의 원찰이다. 원찰이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말한다.


취선사에 대한 기록은 기이편에 나온다. 혜공왕 15년(779) 김유신 장군의 묘에서 말을 탄 혼령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4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현릉(미추왕릉)에 들어갔다. 유신의 혼령은 왕(미추)에게 후손의 억울한 죽음을 거세게 호소하며, 더 이상 자신의 공을 몰라주는 나라를 재앙과 환란 속에서 구하고 싶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세 번을 청한다. 하지만 왕은 세 번 모두 거절하며 백성들을 지켜달라 하니, 결국 거세던 회오리바람은 돌아간다. 이 내용을 전해 들은 혜공왕은 몹시 두려워져 대신을 보내 김유신의 능에 가서 용서를 빌게 하고, 공덕보전을 취선사에 전해 명복을 빌게 했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취선사지가 수몰돼 댐의 물을 방류하지 않는 한 어떤 흔적도 확인할 수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경주 봉서산에 창건된 또 다른 김유신의 원찰 원원사(遠願寺)의 유물을 살펴보며 취선사의 모습도 짐작해 본다.

문수보살과 변재천녀를 만난 연회의 문수사(文殊寺)
 

▲ 임인년 봄에 내린 첫눈

이동해 문수사 주차장에 내리니 작년 겨울에도 보지 못했던 귀한 첫눈이 내린다. 맞은편 거무스름한 남암산에는 희뿌연 산안개가 피어올라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들뜬 마음으로 오르막을 조금 더 걸어올라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문수사를 만났다. 이곳이 삼국유사 속의 그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연회라는 승려가 문수사에서 매일 ‘묘법연화경’을 독송하는데 연못의 연꽃이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원성왕은 연회를 국사(國師)로 초빙하려 했는데, 소문을 들은 연회는 서쪽 고개 너머로 달아났다. 그가 고개를 넘자 밭을 갈던 노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 나를 매어 두려 하므로 피하려 한다.”고 말했다. 노인은 “뭐 수고롭게 멀리 갈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5리쯤 더 가다가 이번에는 시냇가에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역시 앞서 노인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노파는 “앞에 만났던 노인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연회는 부끄러움을 느껴 급히 돌아왔고, 후에 국사가 돼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연회가 만났던 노인은 문수보살이고, 노파는 변재천녀였다. 그래서 연회가 넘었던 고개를 ‘문수고개’,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라고 부른다.
 

구름 타고 삽시간에 중국까지 다녀오던 낭지의 혁목암(赫木巖)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천왕문 역할을 한다는 문바우틈 보러 가는 길, 검푸른 돌계단이 비에 젖어 제법 미끄럽다. 계단의 군데군데 석탑 부재로 쓰였을 법한 다듬어진 돌도 보인다. 혁목암은 현재 남아있는 흔적은 없지만 추정 위치는 대체로 현재 문수사가 있는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천왕문 역할을 한다는 문바우틈

이 암자에 살던 승려 낭지는 신통한 능력이 있어,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으로 가서 청중과 함께 강의를 듣고 삽시간에 돌아왔다. 그래서 그곳 승려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다. 하루는 여러 승려에게 지시하기를 “다른 절에서 온 스님들은 그곳의 이름난 꽃과 진귀한 식물을 도량에 바쳐라.”고 했다. 낭지가 이튿날 산중에 있는 이상한 나뭇가지 하나를 바치니 그곳의 승려들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하는데, 오직 서천축(인도)과 영축산(신라) 두 곳에만 있다.”고 했다. 그제야 승려들은 그가 신라 영축산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신라 사람들은 그 암자를 혁목(赫木)이라 불렀다. 당시 드물었던 ‘혁’이란 나무는 과연 어떤 식물이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 문수사 가는길

 

▲ 문수사가는 길에 돌계단으로 쓰인 석탑 부재

동해용과 그의 아들 처용을 위한 왕의 선물 망해사(望海寺)

문수산에서 내려와 망해사가 있는 영축산으로 이동하니 눈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한층 청량감이 더해진 공기에 마스크를 살짝 내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창건 설화는 처용랑 망해사조에 나온다. 헌강왕(재위 875~886)이 개운포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관에게 연유를 물으니 동해용이 일으킨 것으로 용을 위해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한 절을 지으라 명하자, 그 즉시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동해용이 일곱 아들과 함께 바다에서 나와 노래와 춤을 추며 왕의 덕을 찬양했다. 동해용은 보답으로 아들 중 한 명을 왕에게 보내 나랏일을 돕게 했는데, 그가 관용의 대명사로 알려진 ‘처용’이다.


왕은 궁에 돌아와 영축산 동록(東麓)에 동해용을 위한 절을 지으라 명해 망해사가 창건됐다. 망해사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망해사는 1957년에 새로 지었는데, 대웅전 외벽에 창건 설화 내용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보물로 지정된 2기의 망해사지 승탑 옆에 서니 멀리 동해의 푸른 바다가 보인다. 승탑 뒤로 금당(부처를 모시는 불전)의 주춧돌로 보이는 유물을 확인하고 300년 전 이곳을 다녀간 홍세태(울산목장 감목관)의 한시 ‘망해사’를 읊어본다.
 

▲ 망해사 대웅전의 벽화에 창건 설화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매의 측은지심을 상서롭게 여겨 길지로 점쳐진 영축사(靈鷲寺)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포근하게 느껴지는 안영축마을 한가운데, 발굴된 땅의 맨얼굴이 보인다. 한쪽에는 기와편이 쌓여있고, 곳곳에 석부재들이 널려 있는데, 앞서 보아왔던 사찰들 중 옛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창건 설화는 탑상조에 별도로 기록돼 있다. 신문왕 3년(683) 재상 충원공이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城)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 동지들에 이르러 쉬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쫓으니, 꿩이 금악 쪽으로 날아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공이 매의 방울소리를 듣고 찾다가 굴정현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과 같았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었으며, 매도 또한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잡지 않았다. 공은 이것을 보고 상서롭게 여겨 그 땅을 점쳐봤더니, 절을 세울 만하다 하므로 서울(경주)로 돌아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영축사’라고 했다. 절을 짓기 위해 현청까지 옮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신라에서 불교가 갖는 영향력이 그만큼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 영축사지 발굴 현장

다섯 사찰의 ‘흔적’에 대한 고찰

취선사는 댐이 건설되기 전부터 마을 주민들로부터 유물이 여러 차례 발견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적대장 <문화유적총람>에도 축성사지로 기록돼 있는 등 사찰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채 댐 속에 잠겼다. 문수사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73년 울산광역시 전통 사찰 제3호로 지정됐고, 1894년에 롯데 창업주 신격호의 시주로 대웅전을 신축해 지금에 이른다. 혁목암은 기록에 쓰인 내용으로 보아 지금의 문수사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로 비정하는데 확실히 알 수 없다. 망해사는 보존된 유물과 기록으로 봤을 때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다 1870년대 이후의 기록에서 폐사지로 확인된다. 1957년에 김영암 스님이 새로 지은 사찰이 현재에 이른다. 영축사는 가치를 인식한 울산박물관이 학술발굴을 위해 직접 토지를 매입해 무려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절의 규모가 경주 감은사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수의 수준 높은 유물들을 발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한류와 문화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 시대에 당장의 이익을 위한 개발만 하기보다 유물의 보존과 학술발굴을 위한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진다면, 문화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울산 역사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영축사지에서 단체사진

조은미 시민기자,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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