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깨워주는 홍차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 기사승인 : 2021-08-31 00: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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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유난히 눈이 잘 떠지지 않는 아침이다. 장맛비 때문인가. 기상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몸이 찌뿌듯하다. 이럴 때는 역시 몸과 정신을 깨워 줄 음료가 필요하다. 출근 준비로 바쁜 평일이라면 속전속결 모닝커피를 선택했겠지만, 주말 아침을 깨우기에는 모닝티가 더 좋겠다. 


느긋하게 졸린 눈을 비비며 잠옷 차림으로, 비 오는 우중충한 날씨에 어울리는 여행지를 골라볼까. 비 내리는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찻장을 보니 문득 그리운 지난 여행지가 떠오른다. 오늘의 차는 잉글리쉬 브랙퍼스트티(English breakfast tea). 영국의 아침 차.


A cup of tea-비 내리는 런던. 늦가을의 비가 내리는 거리. 오래된 돌길은 비에 젖어 반들거리고 사람들은 옷깃을 세우고 움츠린 채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한다. 나는 창밖으로 약간 우울하고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짙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비에 젖은 낙엽, 젖은 나무껍질의 냄새. 약간의 흙내음. 입안에 맴도는 곡물의 향기. 비에 젖어 낮게 깔린 꽃의 아스라한 향기. 


창밖의 빗소리에 느껴지는 으슬거림을 감싸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는 이불의 보드라운 감촉이 금세 나는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아침 차에 넣는 우유는 마치 “5분만 더.”를 외치며 머리까지 덮는 이불 같다. 


브랙퍼스트티는 이름 그대로 아침을 깨워주는 홍차다. 전 세계 홍차 시장과 홍차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블랜디드 티(Blended tea)다. 


차를 만들어내는 회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진한 맛을 내는 찻잎들이 사용된다. 실론, 아쌈, 케냐 등이 주로 사용되고, 영국 대부분의 사람이 아침마다 즐기는 차이기 때문에 블랜디드된 찻잎들은 아주 고급 찻잎을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각 찻잎의 특성을 드러내기보단 하나로 어우러진 맛과 향으로 합쳐져 큰 특징이 없이 무난하고, 홍차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맛과 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홍차라고 했을 때 특히 영국의 홍차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향과 맛이다. 가장 스탠다드한 홍차의 맛. 우리로 치자면 현미녹차랄까. 아니 노란 봉지에 든 믹스커피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떤 물로 우려도, 어떤 온도로 우려도 늘 일정 기준 이상의 맛을 보장한다. 


하지만 차를 만드는 회사마다 조금씩 다른 영국의 아침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로는 비가 갠 후의 맑은 아침을, 때로는 아침 일찍 문을 연 과일가게 앞의 풍경을, 또 어떤 차는 아프리카의 초원지대가 연상되는 이국적인 아침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체로는 창밖으로 비 내리는 쌀쌀하고 어두운 거리가 보이지만, 아늑하고 안락한 거실에 있는 느낌을 준다.


영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느낌을 잘 알리라. 영국 영화나 드라마, 음악과 문학에는 언제나 이 음울한 영국 날씨를 감싸주는 ‘a cup of tea’가 등장하니까.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 식사 장면이 삐지지 않듯이 영국의 영화나 드라마에는 차 마시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몇 가지 영국의 문화 콘텐츠에 열광하는데, 홍차나 홍차다구에 탐닉하고부터는 이전에 좋아하던 드라마 영화 음악도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해리포터 시리즈’다.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함께 해온 해리포터 시리즈를 책과 영화 모두 좋아한다. 해리포터에 대해 나는 소위 덕후라고 불리는 종류의 사람이다. 


해리포터에도 많은 티타임 장면이 등장하는데, 영화 시리즈 중 <아즈카반의 죄수>에는 꽤 비중 있고 중요한 찻자리가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 해리가 점성술 수업 중 찻잔에 남은 찻잎 찌꺼기로 찻잎점을 치는 장면이다. 해리의 찻잔에 검은 개의 형상을 한 찻잎 찌꺼기를 보면서 해리포터 덕후이자 차 덕후는….


저렇게 자잘한 차 찌꺼기가 바닥에 잔뜩 깔리는 걸 보니 패닝급(fanning) 찻잎을 쓴 것 같은데 아쌈이겠지? 동글동글 CTC(Crush Tear Curl)처럼 보이는 찌꺼기도 그렇고. 제아무리 호그와트라도 실습재료로 고급품을 쓰진 않을 테지. 우러난 차의 색을 봤을 때, 아쌈 단독을 썼을 것 같지는 않고, 실론이나 케냐가 섞인 브랙퍼스트티일까? 아니면 애프터눈티일까? 아쌈 실론 케냐, 영국 식민지 역사와 홍차의 역사도 같이 가네. 그나저나 저렇게 지꺼기가 가득 깔릴 정도라니 찻잎을 거르지 않고 바로 주전자에 우렸나 보군. 어린 애들한테 탕약을 먹일 셈인가. 미래를 내다보려면 미각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장면에서 나는 사뭇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한다. 사실 CTC 형태의 찻잎은 아주 고급품은 아니며, 향은 약하면서 쓴맛이 있는 편이다. 짧게 우려도 맛이 강하게 나기 때문에 정신이 번쩍 날 수 있는 아침 차에 주로 쓰이며, 우유와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브랙퍼스트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한잔의 차가 주는 다양한 향기와 맛이 조금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티로 대표되는 이 차는 다른 차들처럼 자연의 다양한 아로마와 풍경이 아니라, 지극히도 영국적이고 서민적인 명료함으로 우울한 기후를 표현하고 또 반대로 따스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하면서 그 자체로 영국문화가 가진 서사를 펼쳐낸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료가 가진 문화적 서사는 상당한 힘이 있다. 지구 반대편의 방구석에서 단 한잔의 차로 자연과 기후, 사람, 역사, 영화 속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영국의 아침 차 한잔으로 호그와트 기숙사 휴게실까지 다녀온 나는 문득 ‘우리의 문화적 서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음료는 무엇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소주, 막걸리, 믹스커피, 유자차, 녹차, 식혜. 한국의 마실 것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술과 음료들이 생각나지만, 과연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을 만큼 대표하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작고 하찮은 생각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고민하면서 오늘은 나도 찻잎점을 한 번 쳐 볼까.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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