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답사] 태화강국가정원이 남산 북쪽 산자락을 돌아 태화루를 만나다

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 기사승인 : 2022-05-11 0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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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향토사도서관 공동기획
향토사 주제답사(10)

위용 되찾은 조선시대 영남 3루 ‘태화루’

태화루는 조선시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영남 3루로 전해지고 있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와 643년(선덕여왕 12) 울산에 도착해 태화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태화루는 태화사 경내에 조성된 누각으로 황룡연(黃龍淵)이 내려다보이는 태화강변의 절벽 위에 세웠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태화루는 울산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중수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해 낡아 허물어졌거나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광역시는 2005년 8월 태화루 건립계획을 수립했고, 2011년 9월 착공해 2014년 5월 14일 태화루 경내에서 ‘태화루 준공식’을 열었다.
 

▲ 태화루

주민들은 굶어 죽고, ‘태화강동굴피아’는 배 터져 죽고

신정동의 동굴진지에는 남산의 북쪽, 태화강변의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7곳의 입구가 있다. 첫 번째 입구와 두 번째 입구, 세 번째 입구와 네 번째 입구, 다섯 번째 입구와 여섯 번째 입구는 각각 서로 맞닿게 뚫려 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입구는 들어가면 막혀 있는 상태다.


이 굴은 2차 대전 말기에 평상시에는 군량미 비축 창고로, 전시에는 방공호로 이용할 목적으로 판 것이다.


원당, 팔등, 소정, 거마 등 현재의 신정동과 옥동 주민들의 식량을 수탈해 마대자루에 넣어 소달구지로 실어와 채워 넣었다고 한다.


광복이 돼 이 굴을 열었을 때 쌀과 콩 등의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이 썩어 있었다고 한다.
 

▲ 태화강동굴피아

 

내 이름은 실개천이 아니다. ‘열녀강’

이 강은 옛 ‘이씨열녀각(李氏烈女閣)’ 앞으로 흘러갔다고 하여 이 이름이 생겼다. 이 씨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7대손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7대 외손으로, 아버지 박계숙(朴繼叔)과 함께 <부북일기>(赴北日記,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를 남긴 박취문(朴就文)의 증손인 박종규(朴宗奎)와 혼인했다. 이 열녀각은 처음에는 명정천 옆에 건립했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무너져 현재 중구 태화동 명정마을 흥려박씨 문중의 재실인 추원재(追遠齋) 인근으로 옮겼다.

 

▲ 열녀강

 

이휴정

이동영(李東英)이 1662(현종 3)년에 지은 정자다. 그의 본관은 학성(鶴城)이며 자는 화백(華伯)이고 호는 이휴정(二休亭)이다. 1666년(현종 7) 사마시 소과에 합격했으며 문장가였다. 정자가 “산(은월봉)과 물(태화강)이 좋고 아름다운 곳에 있다”하여 ‘이미정(二美亭)’이라 하였다가, 1664년 이곳에 들른 암행어사 박세연이 읊은 시를 듣고 ‘이휴정(二休亭)’으로 고쳤다. 건물은 원래 울산도호부 객사의 남문루로 쓰였다가 1940년 철거하게 된 것을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구입해 옮겨 지었다. 2003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2008년 복원했다. 

 

▲ 이휴정


이예유허비각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는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 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돼 667명의 조선포로를 쇄환(刷還)하고 삼포조약의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철종 9년(1872) 비명(碑銘)을 받았다. 상말응정 서당골(현재 유허비의 동북쪽)에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비신(碑身)이 많이 훼손돼 없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변에 새 유허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학성이씨(鶴城李氏) 문중의 의견에 따라 1967년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


▲ 이예유허비각


가락국 왕자를 모시는 은월사(隱月祠)

가락국 양왕(仇衡王)의 셋째 왕자이며 신라 대각간을 지낸 김무력 장군과 양주도독을 지낸 무력공의 아들 김서현을 배향하는 사당(祠堂)이다. 가락울산종친회 해강 김규환 회장은 “은월봉 동쪽에 무력공과 서현공의 묘가 있다고 전해 왔으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김장군 묘라고 알려진 지금의 위치에 은월사당을 지어 유지하다가 1806년(순조6) 윤4월에 은월서원으로 승격했다.”고 한다. 1868년 서원 철폐령 때 폐사(廢祠)됐다가 1906년에 양공의 제단과 비(碑)를 설치했다. 1989년에 은월사를 중건해 제향을 모시고 있다.

 

▲ 은월사


시민들의 쉼터 만회정(晩悔亭)

박취문(朴就文)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노후를 보내기 위해 1680년대 내오산(內鰲山)에 세운 정자다. 박취문은 조선 중기 무신 출신으로 함경 회령에서 부방(赴防) 생활을 했고, 병조정랑, 훈련원정 등을 지냈다. 그 후 인동, 갑산, 김해 등에서 부사를 역임했다. 박취문이 만회정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조부 박홍춘의 영향이 크다. 임란공신 학수당 박홍춘이 임란이 끝난 뒤 남산 12봉과 태화강 일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1786~1832년에 만회정은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만회정은 2011년에 울산광역시가 복원한 것이다.

 

▲ 만회정


내오산에 숨어 있는 서장성(徐章聲) 명문

生長秣亭 老終鰲山(말정에서 나고 자라 오산에서 늙었네), 淸江十里 綠竹千竿(맑은 강은 십리요 푸른 대는 천 그루네), 佳城一畝 精舍數間(아름다운 성 한 구역에 정사 몇 칸을 지었네), 歲月雖遠 口碑尙傳(세월이 비록 멀어지더라도 구비(口碑)는 여전히 전해지리). 임란공신 서인충의 후손 서장성(1880~1952)이 새긴 명문이다. 서장성은 태화동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익혔고, 나이가 들어 내오산에 집을 지어 학문에 전념하며 살았다. 서장성의 집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물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한다. 명문은 명정천 하류 동쪽 언덕에 숨어 있다.

 

▲ 서장성 명문

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조은미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사진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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