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3상회의 후 신탁통치 논란…미군정 하지를 만난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0-07 00:00:51
  • -
  • +
  • 인쇄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0)

1945년 12월이 되자 해외에 있던 세력이 대부분 귀국하면서 해방정국은 보다 복잡하게 변화했다. 잡지 <선구>의 정치여론조사에도 나오듯 선호하는 지도자와 지지세력이 나뉘기 시작했다. 여운형, 박헌영, 이관술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 그리고 임시정부의 귀환과 함께 국내에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 김구로 나뉘었다. 


그렇게 원치 않았던 분단으로 갈라진 남한은 좌우의 분화와 대립의 벽이 세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친일파를 우선 고용한 미군정과 달리 제 세력은 일단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공감대는 갖고 있었다. 이는 분열의 조짐은 있었으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전횡을 하기보다 다양한 협력과 합작이 좌우를 넘나들며 시도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국을 한꺼번에 갈라놓는 결정적인 사건이 국내 밖에서 벌어진다. 바로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상이 벌인 회담의 결과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회의 속 신탁통치안
 

▲ 1945년 12월 16~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미국 번스, 소련 몰로토프, 영국 베빈 장관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였다. 외무를 담당하는 장관들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지역에 대한 처리와 원자력 에너지(핵무기) 통제에 대한 부분이 의제였다. 모두 7개의 회의 결과 중 3번째가 바로 한국에 대한 결정사항이었다. 한국에 대한 조항 중에 ‘최장 5년에 걸친 신탁통치’(trusteeship of Korea for a period of up to five years)라는 부분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탁통치’는 미국 정부가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줄곧 주장해왔던 입장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30년 신탁통치에서 후퇴하고 조정한 미국

미국 정부, 그중에서도 대통령 루즈벨트는 ‘조선인은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오판했다.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처음 언급했지만, 그 행간에는 신탁통치(또는 위임통치)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초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조선을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루즈벨트는 신탁통치의 사례로 필리핀을 들었고, 필리핀이 자치 준비기간으로서 50년을 요했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20년이나 30년밖에는 필요치 않다고 설명했다. 루즈벨트가 1945년 4월 12일 사망한 뒤 후임자가 된 트루먼 때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신탁통치였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고,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성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는 신탁통치 입장을 다시 드러냈다. 미군정은 이를 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가리기까지 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를 적극 주장했으나 소련의 반대에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루스벨트가 언급한 최대 30년이 5년으로 바뀐 것이다. 소련은 독립된 정부의 후원 또는 후견을 주장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신탁통치 전에 조선임시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신탁통치는 회의에 참가한 미・영・소 3개국에 중국을 더했다. 여기서 중국은 중공이 아니기 때문에 3:1의 구도로 친소국가가 아닌 친미국가로 신탁통치가 끝나길 바라는 밑그림을 완성했다.
 

▲ 얄타회담에 참석한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앞줄 왼쪽부터)

<동아일보>의 3상회의 왜곡보도, 악의적인 오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중 조선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풀이한다면 ‘신탁통치’보다 독립을 위한 ‘임시 민주주의 정부’ 구성이었다. 신탁통치는 임시정부 구성 이후 협의로 진행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35년의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해방을 맛본 민중들은 ‘신탁통치’라는 말이 의심스럽고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자극한 것이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1면 머리기사였다. <동아일보>는 단순한 정보 오인을 넘어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냈다. 빠른 독립을 주장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덮어씌웠다. 반대로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분칠해버린 것이다. <동아일보>는 송진우와 김성수가 지배한 사실상 한국민주당의 기관지였다는 점에서 소련을 적대시하고 미국을 무조건 찬동하는 형태로 나선 것이다. 

 

▲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외상회의에서 논의된 조선독립 문제

더구나 미군정도 미국 정부의 신탁통치 계획을 지속적으로 불평해왔기 때문에 신탁통치 반대(반탁) 입장에 가까웠다. 미군정은 9월에 한반도에 입성한 후 3개월 동안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직접 목격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협상 속에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 역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정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더 컸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뒤 즉각 반탁 입장이 쏟아졌다. 초기 반탁 입장을 밝힌 쪽에는 임정과 한민당뿐 아니라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은 12월 28일 선전부장 정태식의 이름으로 ‘5년은커녕 5개월의 신탁통치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1945년 12월 29일 <신조선보> 조선공산당 정태식 ‘한마음 한 힘 되어 절대 반대하자’


▲ 1945년 12월 29일 <조선일보> 신탁통치 절대 반대…공산당과 인민당이 포함돼 있다

이관술,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과 만나 입장 밝혀


조선공산당은 일단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선전부장 이름으로 밝혔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정확한 결과와 소련의 의중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제기됐다. 일단 소련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인민위원회와 대중단체에서 반대 성명을 내자 난색을 표했다. 박헌영은 소련영사관의 시정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평양에 있는 소련군 사령부의 호출에 응하게 된다. 그리고 해방 후 처음으로 김태준, 최용달, 이순근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박헌영은 평양을 방문하는 동안 소련군 사령부뿐 아니라 김일성을 비롯해 북한 지도층과도 만났다. 


같은 기간 미군정과의 논의는 이관술이 맡았다. 이관술은 12월 30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만났다. 하지 중장이 각 정당 대표들을 군정청으로 불러 3상회의 결과뿐 아니라 신탁통치보다 앞서 만들 임시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대담 결과는 이관술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정리해 밝혔다. 


이관술은 하지 중장이 신탁통치에 대한 전 조선의 여론이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본국에 보고했다고 전했다. 시위 행동이 없기를 바라고 만약 벌어진다면 조선인에게 불리할 점이 있다는 경고성 발언도 언급했다. 하지만 이관술은 하지 중장과 미군정에 대해서 단호하게 본인의 의견을 강조해 천명했다. “나(이관술)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며 현재 우리의 노선은 민족통일전선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 1945년 12월 31일 <자유신보> 하지 중장과 회견한 공산당 이관술 ‘신탁통치 절대반대’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