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숙제 페미니즘

이경하 크리에이터 / 기사승인 : 2021-12-27 0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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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공감

대학교 1학년 1학기 개강총회에서 “불꽃페미액션!”이라는 건배사를 들었다. 구석진 테이블에 여자 선배만 7명이 있었는데 얼마나 목소리가 우렁찼으면 술기운에 졸고 있는 나를 단번에 깨울 정도였다. 스무 살,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창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반페미니즘 집단 또한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할머니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탓에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품고 자랐다. 그렇게 열등감 덩어리로 중학교에 입학했고 우연히 여성학을 부전공한 사회 선생님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됐다. “여자답게 얌전히 살아라”는 이야기만 듣던 내게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선생님 덕분에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금의 내가 됐다. 


하지만 지금의 페미니즘은 6년 전 처음 페미니즘을 배우던 때와는 달라졌다. “불꽃페미액션”을 외치던 선배가 술잔을 들고 다가와 아래위로 흘겨보았다. “너 페미니스트라며. 왜 탈코(탈코르셋의 줄임말) 안 해?”라고 물어보는 선배에게 그때의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만 했을까. “그건 제 자유인데요.”라는 당돌한 대답을 한 덕분에 그 선배가 졸업할 때까지 은근한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특정 남성 연예인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무분별한 루머를 퍼뜨리는 자칭 페미니스트 여성단체의 모습에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 그들을 정녕 페미니스트라고 칭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성별을 나눠서 서로 비난하며 싸우는 청년세대들과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모두가 틀렸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 오늘날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강남순의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두 책을 읽었다. 강남순 작가의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과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돼 있다. 그간 페미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 속에서 쌓여온 오해와 해결책,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강남순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무수히 많은 강연을 해왔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앞에 선’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페미니즘의 세부 분야를 공부하면 할수록 알아야 할 문제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통달할 수 없다고 한다. 강남순 작가는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책에서 21세기 현대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정의를 복합화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착점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어야 한다. 성별, 인종, 동성애 등 모든 것들의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것”이라고 21세기 페미니즘을 정의한다. 이처럼 작가는 페미니즘에 대한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정의를 갖고 구체적이고 특정한 정황에 개입하는 것이 21세기 페미니즘의 과제이며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즉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계속해서 공부하고 고민하며 모두가 보다 더 나은,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반감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정세랑 작가는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소설의 특성상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애증관계였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 시절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차별과 수난을 견디며 살아야 했을까. 유년시절 원망의 대상이었던 할머니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고, 처음으로 할머니의 생애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는 책 속 주인공 심시선 집안의 여성들을 “기가 센 것이 아니라 기세가 좋은 여자들”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이 한 문장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반감이 강한 현재 사회에서 이렇게 유쾌하고 부드럽게 페미니즘을 설명할 수도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비난과 조롱이 없으면, 과격하지 않으면 아무도 페미니즘을 봐주지 않는다고 주장한 21세기 소수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내게 왜 ‘탈코르셋’을 하지 않느냐며 괴롭히던 선배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소설 속 심시선이 한 말처럼, 그들이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비록 책을 통해서 시원하고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여성차별’이라는 작은 관심범주에 머물러 있던 내 시각과 지식의 폭을 넓혀준 고마운 책이다. 페미니즘은 그 어떤 전문가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변혁하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양상을 무작정 손가락질 하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세랑 작가와 강남순 작가처럼 유쾌하고 친절하게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야 한다. 페미니즘이 우리의 삶을 자유와 평등세계로 가꾸게 하는 ‘창의적인 변혁적 도구’가 되는가, 아니면 ‘파괴적인 도구’가 되는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많은 이들이 두 책을 통해서 차별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차별하는 이들에게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경하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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