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 함락, 김삼룡과 이주하는 개전 다음 날 처형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5-11 00:00:48
  • -
  • +
  • 인쇄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41)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 인민군은 빠르게 38선을 넘어 남진했다. 치밀하게 남침을 준비해왔던 북한에 비교해보면 남한은 북한군의 동향파악부터 허술했다.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이어 조만식과 김삼룡‧이주하에 대한 상호교환 같은 여론 공방 아래 국군의 혼선과 태만이 깔려있었다.


당시 국군은 38선에서 꾸준히 지속했던 국지전을 대비해 내렸던 비상경계령을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기 이틀 전 6월 23일 자정부터 해제했다. 5월 2일부터 시작돼 중간에 잠시 풀렸다가 다시 이어져 해제 전까지 45일 동안 지속했던 경계 강화령이었다.


경계령이 풀리면서 그동안 금지됐던 휴가, 외출, 외박이 허용되자 사병들의 신청이 한꺼번에 몰렸고 사병 중 거의 3분의 1 가까이 병영을 비우게 됐다. 더구나 해제 다음 날이 6월 24일은 토요일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새벽 4시에 병영을 지킨 국군은 그렇게 긴장이 잔뜩 풀려버린 상황이었다.
 

▲ 1950년 6월 26일 <동아일보> 북한 인민군 남침 상황도

 

▲ 한국전쟁 당시 남침에 사용한 북한 탱크 T-34 전차.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옹진에서 강릉까지 38도선 전역 공습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 14연대가 옹진반도에 배치돼있던 국군 17연대를 공격한 순간, 개성과 문산 지역으로 북한군 1사단과 6사단이 밀고 내려왔다. 동두천을 거쳐 의정부 방면으로는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이 T-34 전차 150대와 장갑차 54대 등 우세한 중화기 전력을 앞세워 내려왔다. 춘천과 강릉까지 38선 전역에 걸쳐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에 시작된 공습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은 6시간 뒤인 오전 10시가 넘어선 상황이었다. 경무대 경찰서장이었던 총경 김장흥은 오전부터 비원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남침 사실을 보고했다. 한 시간 뒤 남침 상황 보고와 대책을 논의할 임시 국무회의가 소집된다.


11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는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주재했는데 그는 국무총리 서리를 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남침 상황이 충분히 취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빈약한 보고가 이어지면서 한 시간 만에 회의가 중단된다.


오후 2시에 재개된 국무회의는 이승만 대통령 직접 주재했다. 이때 채병덕 국군 총참모장은 “38선 전역에 걸쳐 4만 명에서 5만 명의 북괴군이 9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불법 남침을 개시했으나 각 지구의 국군부대는 대전차포로 적 전차를 격퇴하면서 작전을 전개 중이다.”라고 보고했다.


아울러 “북괴의 침공은 그간에 그들이 벌여온 위장평화공세가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조급하게 벌인 상투적인 수단으로 보며 후방사단을 진출시켜 반격을 기생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고했다.
 

▲ 1950년 6월 27일 <경향신문> 아군 용전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 중

국군 지휘부의 오판과 국민을 기만한 언론 오보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의 ‘격퇴’를 자신하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국무회의의 긴장감이 떨어졌고, 별다른 결의사항 없이 1시간 30분 만에 산회했다. 전쟁 초기 부실한 정보수집뿐 아니라 무능한 지휘부의 안일한 판단이 더해진 결과였다.


전쟁 상황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국무회의보다 훨씬 빨랐다. 국방부의 요청으로 오전 7시부터 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해 남침 상황이 속보로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전쟁 개시와 함께 38선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방송 내용은 차분하고 낙관적이었다. 국방부가 늘 사용했던 문구 그대로 “국군 10만이 건재하니 전 국민은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됐다.


임시국무회의가 1차 산회한 직후인 12시 방송 담화 때는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이 개시됐다는 정보와 함께 국군이 ‘적절한 작전’을 전개 중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국군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안심하고 동요되지 말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남한 정부의 언론 통제와 조작된 정보를 바탕에 둔 오보는 이후 큰 혼란을 빚게 했다. 6월 26일 아침부터 발행된 모든 신문에서는 북한군이 서울에 도착한 그 날 아침까지 격퇴와 북한군 패주에 이어 북으로 진격한다는 오보가 계속됐다.


심지어 6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중앙방송을 통한 생방송으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국군은 총 반격전을 개시해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거짓 선무방송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작된 방송이 나가는 상황에도 북한군 정찰기가 서울 상공에 출현했고, ‘국군이 북침해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은 전단이 살포됐다. 이 전단은 전황을 알리는 방송에서 ‘옹진의 제17연대가 해주시를 점령했다’ ‘국군이 38선에서 20㎞까지 북진했다’는 허위보도와 맞물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북침론’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해주를 점령했다는 17연대는 방송이 나갈 때는 이미 인천으로 후퇴한 상황이었고, 조금이라도 북으로 전진한 때는 일시적으로 동두천을 수복했으나, 인근 2사단의 붕괴되면서 바로 포위당해 서울과 후방으로 후퇴한 7사단의 사례가 전부였다.
 

▲ 1950년 6월 27일 <동아일보> 국군 북상 총반격전 전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상룡과 이주하 처형

전쟁 발발 초기부터 서울이 함락되는 3일 동안 정부의 대응은 혼란을 거듭했다. 첫 번째로 초기전투에서 기습을 당한 국군은 병력 수와 무기 장비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이미 북한군 주력부대는 국공내전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측 한인들이 편재된 정예군이었다. 그리고 T-34 전차와 장갑차 부대가 앞에 서고 포병 화력 역시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


그렇게 준비된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을 비상경계령마저 해제된 직후 상황에서 빠르게 저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개전 첫날 국무회의 때도 남침 배경을 오판한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주장은 그 상황을 잠시 호도할 뿐이었다.


신성모는 남침 요인으로 위장 평화통일 공세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서두를 뗀 바 있었다. 그런 발언의 배경에는 김삼룡과 이주하를 조만식과 교환하려고 했던 북한의 계획이 깨진 것이 한 몫 했으리라는 판단도 포함된다. 그래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전황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전면남침이 아니라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김삼룡과 이주하를 빠르게 처형할 것을 결정한다. 국방부의 호언장담과 달리 전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던 26일 오후 6시에 남산 헌병사령부로 옮겨서 수감 중이었던 두 사람을 즉결 처형한 것이다. 합법적인 절차는 당연히 없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체포된 상태에서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결수였다. 하지만 헌병사령부 뒷문 500m 지점에서 소나무에 묶은 뒤 총살했다.


북한군은 점점 서울을 향해 네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상공에 나타나 전단을 뿌리고 돌아가는 북한군 정찰기의 출몰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불안감이 늘어났다. 전선에서 부상당해 후송된 병사들을 통해서도 불리한 전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갔다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 구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정부 요인들과 함께 후방으로 피신을 논의했다. 6월 26일 심야에 열린 비상국무회의에 이범석 전 총리를 참석시켜 의견을 들은 뒤 수도 사수 대신 수원으로 정부를 이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다음날 오전 6시 중앙방송은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한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불안감과 혼란이 현실이 돼 서울 시민들을 덮쳤다. 지금까지 나왔던 전황 보도를 완전히 뒤엎는 보도였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공포에 빠지자 당시 공보처장 이철원은 앞선 보도를 취소하고 “정부 각 기관은 수원 이동을 취소하고 중앙청에서 계속 근무하는 한편 국회는 국민과 더불어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면서 전황이 좋아졌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방송은 더 커졌다. 오후 4시에는 국방부가 나서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할 것이며 국방군은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고 특별방송을 했다.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 방송을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내용은 “UN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수송으로 무기와 물자를 날아온다. 국민은 고생이 되더라고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6월 27일 밤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의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하지만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서울을 이미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승만은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정오에 대구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북상해 대전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반이었다. 한강 이남이더라도 서울 인근이 아니라 아예 최후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 되돌아 왔을 뿐이었다. 그때 국민이 혼란에 빠졌다는 공보처의 보고를 받고 전화기를 통해 녹음한 시간은 오후 9시였으며, 방송이 모두 송출된 후 3시간 뒤에 북한군은 서울에 진입했다.
 

▲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공격축선 상황도.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서울 진입과 국군 후퇴, 서울 시민 몰래 한강 다리 폭파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머물며 거짓방송을 내보내는 동안 정부는 후퇴 결정만 내렸을 뿐 구체적인 전선 철수와 방어계획, 국민 피난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국군 최고위 수뇌부인 참모총장 채병덕은 전황 판단이 어긋나 있었다.


시시각각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 인근까지 도착한 상태에서 “서울을 사수한다. 그리고 반격으로 전환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낙관론을 설파했다. 하지만 결국 28일 새벽 1시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 전선으로 그렸던 미아리방어선이 북한군 탱크에 밀려 붕괴했다.


채병덕은 서울 방어선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자 그동안 줄곧 외쳤던 서울 사수와 다르게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를 지시했다. 국군은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폭파를 시작으로 3개의 철교를 폭파한다.


국군이 TNT 3600파운드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이유는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최대한 늦추겠다는 전술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를 건너고 있던 피란민이 목숨을 잃었고 앞으로 피난길에 오를 예정이었던 시민들의 발이 묶였다.

 

 

▲ 국군이 폭파한 한강 다리. 왼쪽이 한강철교, 오른쪽이 인도교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