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의 정신 중정(中正)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1-07-20 0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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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어느 날 제주도 대정에서 추사(秋史) 김정희와 조선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찻자리를 함께했는데 이때 초의는 추사에게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를 설파하는 중 차의 근본이요 정신을 중정(中正)이라고 했다. 중정은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으며 초의선사는 항상 차를 우릴 때 중정을 강조하므로 차 생활의 대원칙을 제시했던 것이다. 유배지 찻자리에서 초의는 추사에게 “지금까지 말을 요약하면 차를 따는 묘(妙), 차를 만드는 정(精), 차를 저장하는 조(燥), 물을 얻는 진(眞), 차를 끓이는 결(潔)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것이 중정(中正)이야”라고 했다. 


찻자리의 중정이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당해야만 차의 향과 맛이 좋고 차기(茶氣)도 온전히 전달된다는 의미다. 차호(茶壺)에 차를 넣을 때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알맞게 넣어야 한다. 많으면 맛이 떫고 향은 가라앉으며 물이 많으면 탕색은 맑지만 맛이 부족하다. 또한 아무리 좋은 차와 물이 있다 해도 적당한 온도와 시간 조절이 안 되면 맛과 향과 기가 죽어버린다. 그래서 다도의 처음과 끝이 중정(中正)인 것이다. 제다(製茶)의 과정에서도 다인(茶人)이 중정을 잃어버리면 좋은 차를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의 정신을 중정이라 말하는 것이다.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말한 중정은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인 중용(中庸)과 궤를 같이한다. 중용이란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어 올바르며 변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고대 중국의 제왕들이 정치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인 사서삼경 중의 하나다. 이러한 중정은 비록 찻자리뿐만 아니라 세대를 초월해 모든 분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정신이며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갈라져 반목하는 이 땅의 많은 지도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근원적 사상이요 가치가 아닌가 싶다.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고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야말로 우리가 함께 세워야 할 대동세상의 진정한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도 지극한 덕(德)이자 군자가 추구하는 가치라고 중용을 칭송했다. 중용은 어려운 철학 이론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최적의 지점이 중용이며 그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중용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지도자가 중용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다. 중도로 가지 않고는 진정한 정치도 화합도 불가능하다. 통일을 말하면서 왜 그렇게도 편향돼 있는지, 환경을 말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만 쳐다보는 사람들, 이들이 중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그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하겠다. 아니 이 지구가 중용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중용이야말로 공생과 상생의 도이며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우르는 생명의 길인 것이다. 다도(茶道) 또한 중정(中正)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중정을 따라 찻자리에 앉으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나는 지인들에게 차를 이야기하면서 늘 찻자리에 펼쳐지는 중도(中道)의 세계를 경험하라고 말한다. 


중정을 따라 차를 우려낼 때 최상의 차를 마실 수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친구인 추사(秋史)에게 차 강의를 하면서 중정을 최고의 덕으로 말했으니 유학자인 추사는 중용의 한 장 한 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깊은 차향에 젖었을 것 같다. 노자도 도(道)는 무릇 물과 같다고 했다. 차호(茶壺)에 물을 부으며 물처럼 살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가장 쉬운 길이 있는데, 가장 편한 자리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따라 걸어가는지 모르겠다. 중정의 길에서 차 한 잔을 우려내고 너와 나의 만남을 소중히 가꾸어 가야 한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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