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장인의 삶을 기록하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07-19 0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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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아흔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망치를 든 이가 있습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그의 망치질에 불을 뿜는 용이 작은 은판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유례가 없는 더위가 예상되는 한여름임에도 장추남 선생은 이른 아침 병영의 집을 나서 원도심의 작업장, 고정민예사로 출근합니다. 그리고는 낡고 때 묻은 선풍기 앞 작업대에 앉습니다. 그의 작업장 앞에는 울산 출신 가수 고복수의 동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의 인물이 위치한 자리에 과거이자 현재인 장도장이 공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장추남 선생은 장도를 만드는 장인으로 2019년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1호가 되었습니다. 고(故) 임원중 장인이 장도장으로 1997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후 다섯 번의 무형문화재 지정이 더 있었습니다. 일산동당제(별신굿), 모필장 김종춘 선생, 옹기장(울주외고산 옹기협회), 전각장 정민조 선생, 벼루장 유길훈 선생이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죠. 임원중 장인이 세상을 떠난 후, 2019년부터 장추남 선생이 무형문화재 1호 장도장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울산쇠부리소리가 무형문화재 7호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5호 전각장이 고향인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무형문화재 지위를 반납해 무형문화재 5호는 비어 있습니다.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은 과거인들이 향유하던 무형의 문화유산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전통 기능과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나 단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그들이 보유한 기능과 지식을 전승하는 것이지요. 


울산광역시는 올해 울산의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기능과 지식을 전승하기 위한 구술기록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장도장을 시작으로 벼루장과 모필장의 생애 경험과 기능을 구술을 통해 기록화하는 연구용역사업이지요. 연구 결과물은 이후 무형문화재 장인의 구술자서전과 문화유산 관련 콘텐츠 제작 및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될 것입니다. 


울산의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어떤 삶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는지, 현재 그들이 지닌 기능과 지식의 전승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화 작업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울산의 무형문화재에 대한 기록화 작업은 이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역의 언론뿐 아니라 울산역사문화대전과 지역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장인들의 삶이 소개됐습니다. <울산의 쟁이들>(노경희·마소연, 울산학연구센터, 2019)의 주인공도 장도장·벼루장·모필장 등 울산의 장인들입니다. 그럼에도 새롭게 구술기록화 사업을 하는 이유는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기록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지요. 기존의 작업들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무형문화재 장인들을 심층면접 조사해 약하거나 빠진 부분을 보충하는 연구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저를 포함한 연구팀은 무형문화재 장도장과 벼루장의 구술기록화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장도장 구술기록화 사업은 이미 시작됐고, 벼루장 관련 사업은 곧 시작될 예정이지요. 7월 13일, 오전 10시에 장도장 장추남 선생과 세 번째 만났습니다. 6월 말 처음 뵙고 나서 두 번째 이뤄지는 구술면담이었습니다. 두 대의 녹음기와 캠코더로 두 시간 동안의 구술면담을 기록했습니다.


장추남 선생은 1930년 일본 나고야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침략전쟁으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해방이 됐고, 큰아버지 가족은 일본에 남았지만, 장추남 선생의 부모님은 홀로되신 할머니를 모시고 할아버지의 고향인 중구 병영으로 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왔답니다. 장추남 선생이 열일곱 살 되던 해였습니다. 작은 덩치에다 우리 말을 못해 동네 또래들로부터 ‘쪽바리’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지요. 해방 직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그렇게 표현됐나 봅니다. 

 


병영에서의 생활은 단칸방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두 살 위의 형은 멸치 후리막에서 일을 시작했고, 선생은 담뱃대를 만드는 공방(당시에는 일간이라고 했다지요)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보조 일을 하며 일을 배웠고, 1년 정도 지나, 혼자서 담뱃대를 만들어 팔 수 있게 되었답니다. 담뱃대로 시작한 작업은 곧 장도 제작으로 바뀌었습니다. 담뱃대의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지요. 나무로 만든 목장도는 점차 고급화되면서 은장도로 바뀌어 갔습니다. 생업으로 시작된 공방 일은 대구와 안강, 영천과 마산, 그리고 부산에서의 생활로 이어졌고, 1984년 다시 병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은장도 제작은 계속됐습니다. 


다양한 삶의 굴곡을 거치면서도 장도장의 삶을 이어온 장추남 선생의 생애 기록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는 작업은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선생이 살아온 시대와 삶의 경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선생의 입을 통해 기억되는 생애경험을 왜곡되지 않게 기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세 번째 구술면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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