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순왕은 왜 울산에 잇따라 절을 지었나

조은미 시민 / 기사승인 : 2021-12-28 00: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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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향토사도서관 공동기획
향토사 주제답사(1)
동축사, 월봉사, 옥천암, 백양사
울산 향토사 주제 답사(1)

경순왕은 통일신라 말인 927년 11월에 즉위했는데, 929년(경순왕 3년) 진흥왕 때 창건한 동축사를 중창하고, 930년(4년) 월봉사, 931년(5년) 옥천암, 932년(6년) 백양사를 창건하는 등 1년 단위로 울산의 동부 권역에 사찰을 지었다.


울산향토사도서관 향토사답사회 회원들과 이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네 곳의 사찰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분담해 각자 발표하기로 했다. 남구문화원에서 출발한 회원들은 사찰이 창건된 순서대로 돌아보았다.

서축(西竺)과 인연이 닿은 동축사(東竺寺)

동구 남목 마골산에 있는 동축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서축(인도)의 아육왕(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육존상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며, 1불(佛), 2보살의 모형과 황철 5만7000근, 황금 3만 푼을 큰 배에 실어 보냈다. 배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하곡현 사포(현 반구동 유적 추정)에 닿았다. 하곡현의 관리가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배가 닿은 곳의 동쪽 가장 높고 깨끗한 곳에 절을 짓고 그 모형을 봉안하라 명하여 573년(진흥왕 34년) 동축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배에 함께 실려 있던 그 황철과 황금은 왕경(경주)으로 옮겨져 장육존상이 주조되고, 이는 황룡사에 봉안했다.

창건설화 속 그 동축사인가?

현재 동축사로 불리는 곳이 창건설화 속의 사찰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데, 그 이유로 진흥왕대에 건립한 사찰이 ‘산지 가람’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과 반구동 유적과 연결된 서원산에 동축사로 추정되는 죽육사(竹六寺)의 유적이 발굴된 점,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동축암(東竺岩)으로 표기돼 있는 점과 <울산부읍지>(1832년)에 “동축암은 동대산에 있다”고 기록된 점이 그 의견을 뒷받침한다(출처: 울산광역시문화원연합회 <울산지역문화연구> 제2호). 


현재의 동축사는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현대를 지나면서 중건과 중수, 중창을 거쳤다는 점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인 동축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기단의 면석이 일부 사라졌지만 신라시대 전통 양식인 중층기단이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의 돌로 이뤄진 점과 상륜부와 탑신부의 재질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동축사 삼층석탑


동면(東面) 8경 관일대(觀日臺) 바위의 명문

범종각 뒤편으로 관일대에 오르면 소나무가 어우러진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두꺼비를 닮았다고 섬암(蟾岩)이라 한다. 바위에는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울산감목관을 지낸 원유영이 쓴 것으로, ‘동해 해 뜨는 곳의 새벽 광채’를 의미한다. 동축사는 예로부터 명승지로 시인 묵객의 한시들이 남겨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만부의 ‘동축사 가는 길’, 홍세태의 ‘동축사’, 월하스님의 ‘동축암’ 등이 있다.

 

▲ 동축사 관일대 두꺼비를 닮은 섬암(蟾岩)에는 조선시대 울산감목관을 지낸 원유영이 쓴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동해 해 뜨는 곳의 새벽 광채’라는 뜻이다.


고승이 대찰(大刹)이 들어설 자리라 예언했다는 월봉사(月俸寺)

울산에는 함월산이 여러 곳 있는데 각각 다른 지역에 분포한다. 지명학자에 따르면 함월산의 뜻은 ‘절을 품는 산’이라 한다. 동구 함월산에 있는 월봉사는 통도사 말사 중 하나로 930년(경순왕 4년) 성도율사가 창건했다. 성도율사는 계율을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승려였다고 한다. 1700년 이후로 두 차례 중건한 기록이 있다. 월봉사의 창건 일화로는 옛날에 한 고승이 방어진 바닷가를 거닐던 중 함월산을 보니 바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야 할 달이 산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길지(吉地)라 여겨 훗날 대찰(大刹)이 들어설 자리라고 예언했다고 전한다. 1991년 상운스님이 대웅전, 삼성각 등을 모두 현대식으로 개축했다. 유물로는 대웅전에 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1919년에 승려 조완해가 화주(化主)가 되어 신중탱화를 불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6년 90명의 신자가 시주해 영산회상도를 조성했는데 현재 통도사 박물관에 있다고 하며, 1939년에 조성된 칠성탱화는 삼성각에 있다.

 

▲ 동구 화정동에 있는 월봉사. 옛날 어느 고승이 훗날 이곳에 큰 절이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는 예언이 전한다.

 

▲ 월봉사 석탑과 범종루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았다는 옥천암(玉泉庵)

북구 무룡산 매봉 자락에 있는 옥천암은 931년(경순왕 5년) 창건한 암자로, 통도사의 말사다. 창건자는 알 수 없고, 창건 당시에는 오봉사(五峯寺)로 불렸다가,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옥천암(玉泉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375년(우왕1년) 원음대사가 중창한 이후 조선 후기에 중건과 중수가 여러 번 있었다. 현재 가람 배치는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로 이뤄져 있다.

 

▲ 북구 연암동 정자 넘어가는 고개 들머리에 있는 옥천암 대웅전


화려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백양사(白陽寺)

중구 함월산에 있는 백양사 역시 통도사의 말사로, 932년(경순왕 6년) 백양조사가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78년 연정선사가 중창하고,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번 중창과 중건을 거듭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인 백양사 석조부도(승탑)는 비교적 대형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전각형에 편구형(찌부러진 공 모양)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이라 한다. 경내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대웅전의 공포 형태가 다포에 6익공으로 굉장히 화려하다는 특징이 있다. 대웅전 오른편의 삼성각은 한국 불교에만 보이는 독특한 건물로 산신, 칠성, 독성을 모시는데, 밖에서 유입된 신들이므로 건물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칭한다. 대웅전 왼편의 응진전에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석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제26호 아미타삼존후불홍탱화, 제27호 신중탱화가 있다.

 

▲ 중구 성안동 백양사 승탑.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이다.

 

▲ 백양사 대웅보전. 대웅전을 이루는 공포 형태가 다포에 6익공으로 매우 화려하다.

 

▲ 백양사 응진전 안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석조아미타삼존불좌상. 뒷편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인 아미타삼존후불홍탱화가 있다.

탐사를 마무리하며

아침부터 반나절 동안 회원 각자가 맡아 공부했던 내용을 공유하고, 네 곳의 사찰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건 시기는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와 시대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었고, 회원 각자의 관점이 녹아 있는 풍부한 해설로 탐사하는 내내 흥미가 이어졌다. 맨 처음 의문으로 돌아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때 울산 동부에 사찰 창건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서축의 배가 닿았던 울산항은 여러 기록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미뤄 보아 서역과의 교류 거점이었으며 신라의 왕경(경주)으로 향하는 관문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울산항으로 추정되는 현 반구동 일대는 호족 박윤웅(朴允雄)의 근거지였다. 박윤웅은 신라 후기 해상 무역으로 울산 지역에서 가장 흥성했던 호족이다. 박윤웅은 고려에 귀부(歸附)하면서 2등 개국공신에 책봉된다. 태조는 그런 공로를 높이 사, 울산 지역을 흥례부(興禮府)로 승격시키고 박윤웅이 다스리게 했다. 이렇듯 신라말 혼란스러웠던 삼국의 정세에 지방 호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천년 신라의 운명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경순왕 때 이어진 불사(佛事)는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민심을 향한 불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조은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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