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관술, 서울에서 동지들과 상봉하다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7-14 0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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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3)

병보석 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와 고향 입암마을에서 요양하던 중 도주한 이관술은 어떻게 됐을까. 이관술은 울산을 유유히 빠져나간 뒤 방향을 서쪽으로 잡았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갔다. 해방 후 회상기에 당시 행적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소위 대동아전쟁 중의 참혹한 감옥상태를 겪은 뒤 집행정지로 나왔다가 다시 도망한 뒤 솥 땜쟁이 심부름꾼이 되어 전라도 산중으로 촌사람들의 솥을 때주며 댕기다가 팔·일오를 만났는데…”

일제 패망의 징후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오기 전부터 일본 제국주의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것을 짐작한 이들은 많았다. 여운형(1886~1947)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비밀결사로 결성한 ‘조선건국동맹’ 역시 일제 패망을 대비한 지하 조직이었다. 여운형은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지역에 가해진 미군기의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세계대전이 승패가 기운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 총독부의 전향 요구에 시달렸는데 그 시절 찾아온 친구 오건영 목사 등에게 자신의 목격담을 전했다. 미군기의 성능이 더 뛰어나 일본기가 추적하지 못하고, 일제의 심장부 도쿄가 폭격당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은 ‘유언비어’라면서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차단하려고 애썼지만 미봉에 불과했다. 


특히 1945년 일본과 조선에 미군 상륙이 임박하자 일본군은 더 깊은 진지를 구축하고 결사항전을 독려했는데 반대로 패색은 짙어져 갔다. 가장 먼저 강제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이들 중에서 태업과 탈출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제주도와 경상남도를 시작으로 한반도 곳곳에 미군기의 공습이 시작됐다. 


직접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습 폭탄을 겪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마음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패배의 기운은 점점 고조됐다. 더불어 징병 징용·공출·배급에 대한 조선인들의 투쟁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1945년 8월 8일에는 소련군이 만주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도 일본 총독부의 한글판 기관지와 다름없었던 <매일신보>는 거짓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1945년 8월 14일 신문을 봐도 1면부터 일본군이 기세 좋게 미군 함정을 격침시키고 있다는 기사로 도배했다.
 

▲ 1945년 8월 전쟁 보도의 극명한 차이 왼쪽 <국민보> 오른쪽 <매일신보>

 


불시에 다가온 해방…항복 선언

많은 이들이 일제 패망을 직감했다고 하지만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하며 식민지배가 끝나는 순간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방은 수많은 예측을 넘어 불시에 다가왔다. 일제는 1945년 8월 14일 일왕이 참가한 회의를 통해 항복을 최종 결정했다. 전쟁 패배를 시인하는 항복 논의는 그 전부터 진행됐으나 이날 일제 각료들의 논의를 거쳐 항복을 알리는 방송원고가 완성된 것이다. 다음 날 15일 12시에 일본 전역과 조선에 항복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다. 일왕 히로히토의 목소리로 전한 항복 방송은 전날 심야에 녹음을 마친 것이었다. 


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나 한국어신문 <매일신보>에 실린 일왕의 항복 내용은 매우 모호했다. 항복이 아니라 ‘평화재건’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뒤에 일왕의 연설을 널리 알린다는 ‘대조환발’을 붙인 것은 매우 뻔뻔한 짓거리라 할 수 있다. 바로 전날까지 세계대전의 전선에서 일본군의 활약을 알리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 1945년 8월 16일 <매일신보> 평화재건에 대조환발

 

내용을 들여다봐도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했다’는 매우 수동적이고 회피하는 문장을 사용했다. ‘조서’에 들어가 있는 ‘공동선언 수락’이란 19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 선언과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반대로 같은 날 미국 화와이 교민신문이었던 <국민보>와 중경 국민당 기관지였던 <대공보>에서는 명확하게 일본이 항복한 것을 대내외로 알리고 있다. 다음날 8월 16일 경성 일대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이름으로 포고문이 배포됐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줄여서 건준)는 8월 15일 오전 8시, 여운형이 일본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와 시작한 면담을 마친 뒤 당일 밤에 급하게 결성한 단체다. 조선총독부는 총독 아베 노부유키 대신 엔도를 면담에 내보내 일제가 항복하는 조서를 여운형에게 설명했다. 여운형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내용도 이때 처음 들었다고 한다. 엔도는 여운형에게 긴급하게 조선 내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는 협의를 요청했다. 


그러자 여운형은 정치·사상범의 즉시 석방, 3개월간의 식량 보급, 치안유지와 건국 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한다. 총독부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석방을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미루려고 시도했으나 협상 자체를 결렬시킬 수 없었다.
 

▲ 1945년 8월 15일 <중경 대공보> 일본항복(왼쪽),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포고문(오른쪽)

 


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16일 ‘조선동포여!’로 시작되는 짤막한 포고문을 배포한 뒤, 같은 날 오후 1시 서울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총독부와 회담했던 경과와 내용을 담아 보고연설회를 개최했다. 연설문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독부 엔도를 만나)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중략)…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출처: <여운형 평전> 이기형, 실천문학사)


또 건준 부위원장으로 선임한 안재홍은 라디오를 통해 ‘한·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경위대 편성과 조선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해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정책 등 몇 가지 정치 운영 대책을 발표할 것을 알렸다. 


건준이 개최한 집회에서 밝힌 여운형의 연설, 라디오로 송출된 안재홍의 담화 내용을 요약하면 친일파들을 제외한 좌우를 모두 통합해 건국 사업에 매진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포고문 첫머리에 밝힌 대로 모두에게 ‘자중’과 ‘안정’을 요구했다. 해방 직후 혼란을 최소화하고 여러 지도자가 모일 때까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건국준비위원회 보고회

 


서울에 도착한 이관술 그리고 박헌영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한 건준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선전 활동과 치안유지에 나섰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감옥 문이 열리면서 석방된 이들과 함께 만세 소리가 경성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이관술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해방 당일에는 대전에 머물고 있었고 고물을 줍는 넝마주이로 변장한 상태였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 이관술의 심경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 기뻤을 것이며 누구보다 홀가분하고 또 누구보다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해방이 됐으니 일제 경찰들을 피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또 땜쟁이, 숯쟁이, 거렁뱅이 그리고 넝마주이로 변장하는 것도 더 필요 없었다. 그런 기쁨과 함께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감옥에 갇혀있는 동지, 전국으로 흩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동지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 다시 볼 수 없는 동지들이었다.


이관술은 서울서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것은 이현상이다. 두 사람 모두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나와 도주했던 처지에서 해방을 맞이해 돌아온 처지였다. 박헌영은 광주 벽돌공장 인부로 위장했던 신분을 벗고 트럭을 타고 서울로 되돌아왔다. 박헌영은 8월 16일 전남 건준이 결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상경할 채비를 갖추며 자신을 감춰줬던 공장주인 이득균과 작별했다. 그리고 8월 17일 오후 서울로 떠나는 목탄 트럭을 올라타고 광주를 벗어났다. 그때 이순금을 비롯해 네 명의 경성콤그룹 조직원이 동행했다. 트럭은 다음 날 아침 전주에 도착해 김삼룡과 문갑송을 태운 뒤 19일 이른 아침에야 목적지 서울에 도착했다. 

 

 

▲ 1973년 4월 9일 <중아일보> 박갑동의 박헌영 회고문 중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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