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현장을 본 적이 없소” 안순규 양심고백 위증재판과 이관술 출석 공판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1-05 00: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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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8)

이관술은 1946년 7월 6일 서점 앞에서 경찰에 체포된 뒤 수사를 받고 8월 12일 검사국으로 송국됐다. 정식 기소 날짜는 8월 21일이었지만, ‘정판사 사건’ 재판이 열린 이후 다른 피고들과 분리돼 있었다. 그렇게 이관술은 두 달 가까이 기소 상태로 수감된 채 감옥에서 재판 진행 소식만 정해들을 뿐이었다. 


피고인들은 지속적으로 이관술 합석재판을 요구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0월 17일 오전 10시에 열린 21회 공판부터 이관술에 대한 단독심리가 시작됐다. 이후 23회까지 모두 세 차례 진행됐다. 

 

10월 21일에 열린 24회 최종심리 공판에 이르러서야 이관술을 비롯해 다른 피고인들이 모두 출석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마지막 최종심리에서 검사는 이관술을 비롯해 3명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다른 피고들에게는 징역 15년과 10년을 각각 구형했다. 사안의 무게와 과중한 형량에 비해 이관술이 출석한 단독, 합석심리의 진행 기간이 겨우 일 주일도 안 될 만큼 재판부는 일정을 서둘렀다.


특히 기소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이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내세웠던 안순규가 입장을 바꿔 자신이 말했던 내용이 허위진술이라고 법정 폭로한 것도 급하게 덮었다. 9월 18일 안순규가 재판정에서 “인쇄 현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이 고문과 협박 때문에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밝히자 위증죄를 덮어씌웠다. 검사국은 한 날 공판이 끝나자마자 재판정에서 안순규를 체포해 구금했다.
 

▲ 1946년 10월 12일 <자유신문> 이관술 공판 17일 개시

이관술 출석 직전에 따로 열린 안순규 위증죄 재판

‘조선정판사’에서 공장장으로 일한 안순규가 재판정에 나와 ‘양심고백’을 하듯 그 동안의 진술을 번복한 것은 검사와 재판부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목격 증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안순규에 대한 위증죄 공판을 ‘정파사 사건’ 재판의 최종심리 전에 끝낼 의도를 드러냈다.


안순규에 대한 위증공판은 이관술 출석 재판이 잡힌 날에서 이틀 빠른 10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지방법원 4호 법정에서 열렸다. 재판장은 박원삼이다. 이날 검사는 바로 징역 1년을 구형한다. 변호인들은 위증공판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증인 10여 명을 신청했으나 재판부가 모두 기각했다. 일방적으로 짜놓은 각본에 튀어나온 못을 바로 때려 박듯이 끝내버린 것이다.


안순규는 본인이 법정에 나와 밝혔던 ‘허위자백’ 사실을 위증공판에서도 그대로 유지했다. “절대로 위조지폐 현장을 본 적이 없다”고 정확하게 진술했다. 안순규가 경찰에 검거됐던 날은 1946년 5월 9일이었다. 그날 경찰은 취조실에서 안순규의 팔을 묶고 물을 먹이면서 폭행하는 고문을 가했다. 안순규는 이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허위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검사가 경찰서에 파견 나와 본인을 취조할 때도 진실을 말하면 ‘따귀를 때리고 구류장을 내보이며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안순규는 석방된 뒤 여러 차례 양심에 가책이 생겨 고통받았고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소용없었다며 본인이 증인으로 나간 정판사 재판에서 ‘사실대로 양심적으로’ 진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증공판은 안순규가 밝힌 진중한 양심고백이 받아들여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변호인들의 잇단 요구는 재판장이 바로 기각시켰고, 검사는 형법 제16조를 위반한 위증죄로 징역 1년을 구형했다. 또 4일 만에 열린 10월 19일 선고공판에서 검사가 구형한 그대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날은 이관술 단독심리가 한창 열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 1946년 10월 16일 <독립신보> ‘절대로 현장 본 일 없오’ 공장장 안순규 위증공판

이관술 첫 공판, 오전 개정에서는 불법 구금을 들어 재판 취소 요청

10월 17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4호 법정에서 열린 이관술에 대한 첫 단독심리 현장은 매우 스산한 풍경이었다. 재판정을 취재한 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방청석에 불과 10여 명이 앉아 있어 쓸쓸했다고 적고 있다. 반대로 출석한 이관술의 모습은 매우 침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동아일보> 취재기자가 쓴 법정 스케치 기사를 보면 ‘이관술은 처음부터 온순한 태도를 유순한 언어로 침착하게 답변을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변호인들은 이관술과 나머지 사건 피고인들을 병합심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앞서 열린 공판에서 피고자회의를 열고 난 후 피고들이 정식으로 요구한 사항이었다. 재판장 양원인은 요구를 거절했다. 기소가 별개로 됐기 때문에 재판부가 분리해 심리한다는 이유를 들어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의 요구는 용허할 수 없다고 즉각 기각했다.


이관술은 검사를 향해 공소 자체가 불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검사에게 공소 취소를 요구했다. 변호인단에서는 한영욱이 검사의 공소제기까지의 경과를 설명한 후 불법이 드러났으므로 공소사실을 기각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실질적으로 이관술의 구속기간과 검사의 구류장 발행 시기가 법률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재판장은 이에 대해서 즉답하지 않았다. 이관술과 변호인이 요구한 내용에 대해서 따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검사에게 심리를 시작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팽팽하면서도 맥이 빠지는 공방을 거쳐 오전 공판을 끝낸 뒤 오후에 다시 재판이 개정됐다.
 

▲ 1946년 10월 18일 <수산경제신문> 이관술 1회 공판 “불법 공소라고 취소 요청”

이관술은 재판정에서 모든 혐의사실을 철저하게 반박했다

이관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피고들의 기소 내용까지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특히 중요 증인들을 내세워 짜 맞춰 놓은 검사국의 청취서, 공판조서, 현장검증 결과도 철저하게 반박했다. 그 중 안순규가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한 사실과 이영개가 매수당해 거짓 증언한 것을 짚어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심문조서를 낭독한 후 이관술에게 경찰 수사단계에서 초기에 피신한 이유를 물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과 정판사를 경찰이 수색한 날에 오히려 경찰부장 장택상을 면담한 것을 들면서 죄가 없어 당당했다고 밝혔다. 월북하지 않고 ‘남선’인 서울에 남아있었던 것 또한 경찰과 검찰이 조작한 사건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오히려 검사처럼 이관술과 논박을 했다. 먼저 장택상이 이관술과 만난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7월 27일 첫 공판 당시 군중들이 피고들을 탈취하려고 시도했다면서 그것이 무죄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재판장이 보인 일방적인 자세에도 이관술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첫날 수천 명의 대중이 모였는데 그때 벌어진 상황은 계획적인 무엇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 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언급했다.


첫째, 검사들이 제출한 1945년 10월 하순 첫 번째 위폐 인쇄날짜에 이관술 본인은 서울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관술은 안기성과 함께 10월 15일경부터 평양으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둘째, 10월 하순경에는 검사가 위폐 제작을 실행했다고 주장하는 박낙종과 인사를 한 적도 없었다. 이관술과 박낙종이 처음 만난 것은 조선공산당 본부가 정판사가 원래 있었던 근택빌딩으로 이전한 뒤였다. 그러니 위폐 제작을 사전에 공모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실제로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으로 이사했던 것은 11월 말로, 검사가 주장하는 위폐 제작 시기보다 한 달 이상 차이가 났다.


셋째, 위폐를 제작해 조선공산당의 경비로 사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위폐가 아니라 이관술 본인이 개인적으로 사재를 털어 4만 원을 당비로 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관술과 변호인들은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로 평양 여행에 동행했던 안기성과 운전수 윤두관을 증인 신청했다. 그리고 10월 말에는 근택빌딩이 아니라 안국동 행림서원 건물에 입주해있었다는 것을 입증한 건물주 정기섭도 증인 신청했다. 11월 말 이사하기 전 안국동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김창숙도 증인으로 신청했다.
 

▲ 1946년 10월 19일 <독립신보> 반증을 들어 무죄 주장 이관술의 제1일 오후 공판

10월 18일과 19일 단독심리, 21일 합동심리에서 검찰 구형

이관술에 대한 단독심리는 10월 18일 오전 ‘정판사 재판’ 22회 공판으로 이어졌다. 이날도 검사 측이 기소한 내용과 증인 발언, 현장 조사 자료에 논박이 이어졌다. 19일 23회 공판은 이관술이 무죄라고 반박하면서 요청한 증인들을 출석시켜 심문이 이어졌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정영기는 조선공산당이 안국동 행림서원 건물을 소유한 병원 원장 정기섭의 장남이었다. 정기섭이 지방 여행을 가 대신 출석했다. 원래 근택빌딩으로 이사 간 날짜와 검사가 주장한 최초 위폐 제작 시기가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청한 이였다. 아버지를 대신해 증인으로 나온 정영기는 이관술이 주장한 대로 안국동 건물 2층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좌익 계통’ 사람들의 왕래가 심했다고 증언했다. 또 이관술이 주장한 대로 10월 말까지 그 상태였고, 12월 15일경 일부가 이전했으며, 조선공산당 사무실 전부가 빠져나간 것은 1946년 1월 중이었다고 기억해 증언했다.


이렇게 세 번의 단독심리가 끝난 이틀 뒤 10월 21일 24회 공판은 오전 단독심리, 오후에는 모든 피고가 나와 심리 종결과 함께 검사가 구형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날 오전 이관술은 자신의 단독심리 도중 다른 법정에서 판결이 난 ‘안순규 위증공판’ 결과에 대해 유죄를 짜 맞춘 것에 대해 강력히 질타했다. 평상시 이관술의 모습과 사뭇 달랐기에 재판장 양원일도 조심스럽게 답했다. 안순규의 위증재판 판결과 ‘정판사 사건’ 재판 유무죄 판결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장 양원일의 답은 사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정판사 사건’을 검찰이 기소하면서 가장 핵심 증인으로 내세운 증인의 법정 증언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오후 합동심리에서 검사가 낸 구형 결과에 그대로 이어졌다. 이관술을 비롯해 박낙종, 송언필, 김창선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신광범, 박상근, 정명환은 징역 15년이 구형됐다. 김상선, 김우웅, 홍계훈에 대한 구형은 징역 10년이었다. 

 

▲ 1946년 10월 20일 <독립신보> 이관술 제3일 공판

 

▲ 1946년 10월 22일 <독립신보> 이관술 심리 끝나고, 정판사 사건은 검사 논고로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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