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8-11 00: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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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5)

조선공산당은 박헌영과 이관술 등 일제강점기 후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경성콤그룹’의 주도 하에 통합 과정을 밟아 결국 재건됐음을 선포했다. 해방 직후 ‘장안파’가 섣부른 당 결성을 선포한 뒤 한 달 동안 이뤄진 통합 과정이었다. 


‘재건파’가 박헌영 이름으로 내놓은 ‘8월 테제’를 중심으로 내부 통합을 진행하며 헤게모니를 장악해가는 동안 여운형과 안치홍 등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는 외형적으로 전국조직으로 확대됐다. 결성 보름 만에 지방 건준이 145개에 달할 만큼 늘어난 것이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함께 뭉치자는 입장 아래 사회주의 계열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랐다. 그리고 건준 부원장으로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했던 안재홍은 민족세력이 앞에 서고 공산계열이 2선에서 배경이 돼야 한다는 ‘민공협동’ 노선을 내세웠다. 둘의 입장 차이는 점차 커져 갔고 결국 내부에서 여러 부침을 낳게 된다.

건준 내부에 커지는 조선공산당

먼저 송진우를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은 건준 참여를 거부했다. 내건 이유는 해방 직전 일본총독부를 만났을 때부터 내세웠다고 주장하는 ‘임정봉대론’, 즉 중경임시정부가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군이 곧 진주할 것이란 소식이 전달되면서 초기 건준에 참여했던 민족주의 계열 안에서 이탈자들이 계속 늘어갔다.


반대로 조선공산당 재건파는 즉각적인 인민정권 수립을 위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고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로 방향을 잡았다. 결국 여운형이 그렸던 정치세력들을 한 곳으로 규합함으로써, 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 균형의 연합전선은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린 것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연대는 건준 내부에서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의 불안감을 키웠다. 안재홍은 건준의 조직개편 과정에서 외부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대거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1946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박헌영(왼쪽)과 여운형(오른쪽)

 


이는 건준이 8월 28일에 발표된 선언문에서도 확인된다. 건준은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진보적 민주주의 ‘제세력’의 중심에 조선공산당이 깊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반대로 안재홍은 여운형과 만나 세력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자고 성토하며 김병로, 백관수 등과 함께 ‘전국유지자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내부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8월 31일, 건준 지도부는 총사직을 선언한다. 이후 9월 4일에 열린 확대회의에서 지도부 총사직은 반려되고 조직개편이 논의됐지만 민족주의 계열의 입지는 더 줄어들었고 안재홍도 이탈한다. 그런 상황에서 건준은 ‘전국유지자대회’ 대신 조선공산당이 건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 개최에 합의한다.

 

▲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대중에게 격함–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대하여”

 


9월 6일, 조선인공화국 선포

전국인민대표자회의는 9월 6일 경기여고 대강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1300여 명의 인민대표자들이 참가했다. 인민대표들은 여운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주권이 인민(국민)에게 있음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조직법’을 가결했으며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는데 아래와 같은 7개 정강과 27개의 시정방침을 선언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와 중앙인민위원회 구성은 기존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전적 해산(정식 해산은 10월 7일)을 뜻했다. 아울러 지방도 중앙의 변화에 따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는데 남쪽에 145개, 북쪽에 70개가 구성됐다. 이는 거의 모든 시·군을 망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진주와 ‘조선인민공화국’ 부정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회의의 대표성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다. 참여한 인민대표들이 사회주의 계열에 편중됐다는 것, 즉 재건된 조선공산당과 건준 내부 중도파 그리고 이들과 연결된 지방 대표자들이라는 폄하였다. 사실 인민대표자회의는 매우 급하게 소집됐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대회 소집에 앞선 9월 4일, 안재홍이 이탈한 뒤 건준 부위원장을 맡은 허헌이 입원한 경성의전 병실에 모인 여운형, 허헌, 박헌영, 정백 등이 인공 선포와 내부 인물 구성에 대한 논의를 거쳤는데, 좌우 세력이 모인 통일체로서는 부족했다.


급히 서두른 배경 중 가장 큰 것은 한반도 남쪽으로 들어 올 연합국, 특히 미군의 진주에 앞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늦추지 말자는 것이었다. 8월 말부터 미군 진주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9월 2일, 미군 제24군단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의 포고문이 비행기를 이용해 서울시 일원에 뿌려졌다. 이제 곧 상륙할 미군에 앞서 ‘과도정권’이라도 빠르게 세워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자는 복안이 깔렸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9월 8일, 인천항으로 도착한 미군이 9월 9일 서울로 진주해 잔존한 일제 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임을 선포하면서 협의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몰렸다. 같은 날 맥아더 사령부에서 낸 포고문 1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원조 협력하여야 한다. 본관(本官)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의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함께 발표한 6상의 점령 조건 중 첫 번째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시행된다.’는 것의 함의는 중경에서 돌아올 임시정부도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도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 1945년 9월 9일 미군정,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 게양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발표…선전부장 이관술

조선공산당은 인민공화국을 수립을 서두르면서 소련군이 북한에 설치된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준 것처럼, 미군도 행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특히 박헌영은 ‘8월 테제’에서도 미국을 영국, 중국, 소련과 함께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칭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의 전략과 국제 정세에 대한 느슨한 판단이나 오판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또는 미군정과 전면 대립하기보다 협상을 우선한 것은 1947년 미국과 완전히 대립하는 ‘신전술’을 세우는 상황 전까지 유지했다. 


아울러 조선공산당은 해방을 맞이한 조선의 현 상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구성 역시 그런 인식 속에서 좌우 연합정부의 형식을 갖추려 했다. 9월 6일에는 전국인민위원 명단만 공개하면서 발표가 미뤄졌던 조각 명단은 9월 14일에 발표한다. 

 

 

▲ 1945년 9월 7일, <매일신문>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와 전국인민위원 명단

 


명단 발표는 여운형의 반대 입장에도 박헌영이 강행했다. 여운형은 미군정과 좀 더 협의를 진행하고, 불참 세력의 동참을 이끌어 내고자 했으나 박헌영은 좌우의 상징적인 인물을 총망라한 ‘부르주아 민주정부’의 밑그림처럼 공표했다. 그리고 공표에 앞서 조선공산당은 9월 1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인민대회’를 대규모로 개최하며 내부 결속과 함께 여론 주도에 나섰다.


이관술은 전국인민위원 중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관술 앞에 있는 이는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일 만큼 무게감 있는 순서였다. 그리고 박헌영은 아예 명단에 빠져있었으니,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대표한 순번이었다. 그리고 9월 14일에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에서는 선전부장에 이름을 올렸다. 


주석은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등에서 보이듯 조각 명단은 중앙인민위원과 마찬가지로 좌우를 망라한 인선이었다. 그리고 이 명단에서도 박헌영의 이름은 빠져있다. 반대로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 정서가 강한 이승만을 최고 위치에 올려뒀다. 


그럼에도 조각 명단은 여러 갈래의 비판만 남기고 지워지게 된다. 민족주의 계열뿐 아니라 미군정도 조선공산당에 친밀한 명단이라고 판단해서 거부한다. 그리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조급하고 편향적인 명단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심지어 최고 수반으로 이름이 거명된 이승만 조차 귀국한 뒤 정치적 계산 아래 거부 의사를 밝혔다.

 

 

▲ 1945년 09월 24일 <민중일보>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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