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남로당 붕괴와 평화공세 그러나 불시에 밀려온 6월 25일 한국전쟁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40)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4-27 00:00:51
  • -
  • +
  • 인쇄

1950년 3월 27일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면서 지하 남로당은 사실상 붕괴하게 된다. 두 사람이 체포되는 과정은 매우 긴박하면서도 한편으로 어이가 없는 상황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남과 북의 주장뿐 아니라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 경찰과 검찰 관계자들의 증언, 목격자의 증언이 조금씩 엇갈린다.
 

▲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김삼룡의 잠복 생활, 사진은 은신했던 안가

김삼룡과 이주하에 대한 체포 증언 제각각

경찰은 3월 27일 오후 5시에 이주하를 예지동에서 먼저 체포했고, 저녁 11시에 김삼룡을 종로 5가에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에 실린 경찰 발표는 ‘과학적 수사’를 통해 두 거두가 잠복해 있던 안가를 차례로 급습해 ‘무난히’ 체포한 것이라고 스스로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날 경찰이 김삼룡이 은신하고 있던 예지동 안가를 급습한 순간을 목격했던 증언을 보면 체포 순서와 시간이 달랐다.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진 원경 스님(속명 박병삼, 당시 9살)이 한 언론을 통해 밝힌 회고에 따르면 경찰이 급습한 날은 3월 15일 새벽이며, 김삼룡은 담장을 넘어 옆집 지붕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김삼룡은 그 과정에 담장 위에 설치돼 있던 철조망에 걸려 다리에 상처를 크게 입었다.


김삼룡은 상처 때문에 멀리 갈 수가 없어 일단 경찰을 피해 주변 골목에 있던 큰 쓰레기통 속에 숨어 체포를 면했다. 다친 다리를 응급조치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주변이 조용해지면 도주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경찰은 1차 체포가 실패한 후 서울 도심에 검거망을 만들어 2차 체포에 나섰다. 김삼룡의 사진을 확보하지 못한 경찰은 다리를 다쳤거나 저는 이들이 보이면 일단 경찰서로 연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다리가 불편해 보이거나 걸음이 불안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한 숫자가 약 300명에 이르렀다.


경찰이 예지동 안가를 습격할 때 김삼룡의 아내 이옥숙과 세 살배기 아들은 함께 체포된다. 그리고 채소, 반찬, 주류를 판매하는 잡화점을 운영하며 안가를 지켜왔던 이세범도 김삼룡의 도피 시간을 벌다가 체포됐다. 아지트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던 박헌영의 이복형 박지영 내외는 도주했다. 2층에 있던 원경은 쌀가마니 뒤에 숨어 있었다.


경찰이 철수한 후에도 홀로 집에 남겨진 원경은 불안에 떨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다음 날 낮이 돼서야 예지동 안가에 나타난 이주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김삼룡이 체포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체포는 됐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김삼룡은 안가 근처에서 체포를 피해 숨어 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쓰레기통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못 가 근처에서 경찰관에게 발각됐는데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좁은 곳에 갇혀 있다 나오다 보니 거의 탈진 상태였다고 한다. 김삼룡을 체포한 경찰은 이미 전날 체포돼 신원확인을 기다리던 이들과 함께 중부경찰서 1층 대기실에 가뒀다. 그때 경찰은 남로당에서 전향한 이중 김삼룡의 얼굴을 알고 있는 정보경찰 홍민표를 앞세워 경찰서를 순회 중이었다.


이주하는 소식이 끊긴 김삼룡이 연행됐을 것이라 여기고 주변 경찰서를 탐문했다. 이주하는 경찰서에 들어가도 의심받지 않을 9살 나이였던 원경을 먼저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고, 본인은 연행자들의 석방과 면회를 요구하는 이들로 혼란한 틈을 타 변장을 하고 주변에 머물렀다.
 

▲ 1950년 4월 2일 <자유신문> 김삼룡 이주하 체포 경위, 예지동 안가 배치도

정보경찰 홍민표와 공안검사 선우종원의 주장

공교롭게도 이주하와 원경이 경찰서에 머무는 순간 홍민표가 도착했다. 홍민표는 남로당 서울시당 제1부위원장을 지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안기관이 1949년 9월 21일 남로당계 200여 명을 체포한 뒤 전향 대상에 올랐다. 체포 이후 다음날 9월 22일 전향의 조건이었던 국민보도연맹 가입을 밝히는 성명서에 적힌 명단 중 맨 앞에 자리했다. 보도된 날보다 일주일 빨리 체포된 홍민표는 공안검사들의 설득을 받고 전향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정보경찰(경사)로 특채됐다고 한다.


홍민표는 원경이 수갑을 차고 체포돼 있는 김삼룡의 모습을 발견한 그때 경찰서 앞마당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이주하를 지목했다. 남로당 괴수의 체포치고는 매우 어이없는 순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이주하를 중부경찰서 앞마당이 아니라 예지동 안가를 급습해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김삼룡이 도주할 수 있었던 엉성한 1차 체포 작전을 성공으로 미화할 목적으로 보인다.


원경의 회고와 1981년 조선일보에 실린 홍민표(본명 양한모)의 언론 기고를 비교하면 또 다르다. 김삼룡과 이주하 체포를 시도한 날이 3월 27일이 아니라 15일인 것은 같지만 체포 경위가 서로 달랐다. 홍민표는 김삼룡 체포 작전을 검사 오제도와 친일파 출신 고위경찰이었던 최운하의 지휘를 받은 경찰들이 진행했으며, 도주 후 체포된 장소는 북아현동에 있던 의사 집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향한 안영달의 밀고로 김삼룡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검거했고, 바로 치안국 중앙분실로 연행해 오제도가 직접 수사했다고 밝혔다.


오제도와 함께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이 2003년 쓴 회고록 속 체포과정은 앞선 홍민표와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부분이 더 많다. 그는 체포 시도 날짜가 하루 빠른 3월 14일이며 예지동이 아닌 효제동이라고 주장했다. 다리는 철조망 때문이 아니라 뒷담을 발로 차 구멍을 내다가 다쳤다고 했다. 체포 후 취조 과정에서 김삼룡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이주하는 체포 당시 독극물을 삼킬 만큼 단호했지만 이후 심경의 변화가 있어 모든 정보를 순순히 털어놨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지하 남로당이 붕괴됐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체포 과정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 북한은 김삼룡 체포를 도운 전향자들이 박헌영 계열이면서 이후 미국 간첩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공안기관 출신들은 이주하가 김일성을 비판하면서 전향의 뜻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 남로당 지도부에 대한 명예롭지 못한 결말이다.
 

▲ 1950년 4월 2일 <동아일보> 재건 음모 분쇄 남로 조직원 계속 체포

겉으로는 평화회담과 조만식 교환, 안으로는 남침 임박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후 현직 검사를 통해 두 사람을 빼돌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정태식은 일주일 뒤 함정수사에 걸려 체포된다. 이제 남은 이는 박헌영의 수행 비서였고 김삼룡을 흠모했던 박갑동 정도가 있었지만 남로당은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전라도와 경상도 도당은 야산대로 이동한 상태였고 토벌대에 밀려 상호 연락망이 모두 두절된 상태였다.

 

▲ 1950년 6월 17일 <조선일보> 조만식과 김삼룡 이주하 교환, 조건 없으면 단행

김일성과 박헌영은 수차례 소련으로 넘어가 스탈린과 주요 간부들과 만나고 전쟁을 준비했다. 1949년 12월 중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모택동을 비롯해 중국 공산당과도 접촉했다. 스탈린을 향해서는 지속적으로 전쟁 승인을 요청했고, 모택동을 만나서는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한인들을 북한국으로 편입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남쪽을 향해서는 6월 7일, 6월 15일부터 남북 정당들과 단체가 모여 평화통일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6월 8일 평양방송을 통해 전달됐는데 해주나 개성에 모여 전국정당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를 열고 ‘평화통일에 관한 제 조건 확보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1948년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 이전에 벌였던 정치 공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950년 6월 26일 <경향신문> 남침 상황도

소련의 지시로 남북협상을 다시 전개할 것이란 분석 아래 반대 의사를 드러냈던 이승만 정부는 6월 8일 평양방송 이후 북한의 제안을 ‘북한 괴뢰의 음모’라고 단정 짓고 무시했다.


북한은 평화통일 협상 공세 이후 6월 11일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과 남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피검 중인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제안에 대해서는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식을 석방해 남으로 데려오라는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남한 정부는 16일 밤 중앙방송을 통해 조만식을 조건 없이 석방한다면 요구한 두 사람을 북으로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런 교환 협상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협상 자체가 흐지부지된 채 언론을 통해 공회전할 뿐이었다. 실제로 북한이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김삼룡과 이주하의 석방을 원했던 것인지, 남한에 또 하나의 혼란을 주기 위한 선전 공세였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조만식을 먼저 보낼 것을 요구하는 입장과 동시 교환을 주장한 입장이 엇갈리면서 남북협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방이 있는 동안 북한은 인민군을 남쪽으로 전면 이동 배치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한 5만여 명의 한인 병사들도 4개 사단으로 개편해 배치됐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38선으로 남진한 북한 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약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 이들로 짜인 것이다. 이들을 통해 인민군은 전투경험을 충분히 쌓은 정예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전개한 북한에 의해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 1950년 6월 26일 <경향신문> 괴뢰군 전면 남침 기도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