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과 박헌영, 또 운명처럼 새로운 동지를 만나다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6-09 0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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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9)

이관술이 경성콤그룹을 결성하면서 만난 박헌영(1900~1956)은 어떤 인물인가. 일제강점기 1931년 9월 15일에 발행한 잡지 <혜성>(1권 6호)에 실린 ‘해외망명가 열전’에 실린 인물평을 보면 다음처럼 적고 있다.

 

▲ 1926.7.23 <동아일보> 신의주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는 박헌영(오른쪽)

“그는 충남 예산에서 났고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상해에 가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되고 그 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다가 신의주에서 1년 반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으며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의 중진이었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사에서 사회부 기자 동맹파업 때 퇴사했고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공청의 책임비서로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중에 정신이상으로 보석되었다가 애인 주세죽을 데리고 시베리아로 탈주했다. 그는 관후한 성격이고 원만하며 모나지 않으며 수치와 모욕이라도 참기 잘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래서 파벌 대립이 심하던 그때에도 그는 비교적 원활했고 남하고 싸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입는 것도 되는대로 입고 먹는 것도 되는대로 먹었다.” 


신기한 것은 잡지에 실린 인물평이 제대로인지, 8년 뒤 이관술이 박헌영을 만난 날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박헌영, 걸출한 사회주의 계열 지도자

박헌영은 경성고보를 다닐 때 3.1운동에 참가했다. 다음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사상적 변화를 거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나섰다. 모스크바를 거쳐 1922년 4월 국내로 돌아오다 국경에서 체포돼 1년 6개월을 만기 복역하고 1924년 1월에 석방된다. 


그 뒤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해 전국을 돌며 청년운동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그리고 사상단체 ‘화요회’에 참가하며 1925년부터 조선공산당 결성과 재건에 뛰어들었고, 산하 청년조직 고려공산청년회의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이른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발각되자 아내 주세죽과 함께 핵심 사상범으로 체포된다. 


박헌영이 병보석을 받아 석방된 것은 2년 뒤 1927년 11월이었다. 혹독한 고문과 동지들이 죽어 나간 소식에 충격을 받아 사람도 못 알아보고, 재판도 출정하지 못할 만큼 심각했다고 한다. 석방 뒤 요양하면서 국내를 탈출할 준비를 했다. 1928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 뒤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옮겨 3년 생활을 마친 뒤 1932년 상해로 가서 ‘화요회’ 동지였던 김단야(1901~1938)를 만나 ‘꼼뮤니스트 그룹’을 결성한다. 둘은 <꼼뮤니스트>란 기관지를 발간해 국내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1933년 7월 5일 상해일본영사관에 상주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국내로 압송됐고 다시 6년을 복역했다. 만기 출소한 때가 1939년 9월로 박헌영의 나이 마흔이었다. 이관술은 박헌영의 석방 소식을 접하고 조심스럽게 만남을 준비했다. 3개월 뒤 12월 12일에 둘의 만남은 성사된다.
 

▲ 1927.11.24 <동아일보> 보석 출옥한 박헌영(가운데)과 아내 주세죽(왼쪽)

 


경성콤그룹, 확대 과정 중 박헌영까지

1939년 3월에는 경성지역 공산주의자 모임이란 뜻으로 ‘경성콤그룹’이 결성된다. 이관술과 김삼룡이 의기투합해 조직 재건에 나서자 여러 동지가 속속 모여든 것이다. 이름은 예전과 달랐지만 경성 트로이카에서 시작해 경성지역 조선공산당재건그룹을 거쳐 온 항일혁명운동의 과정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합류한 사회주의자들이 이재유그룹 뿐 아니라 코민테른과 연결고리를 내세웠던 권영태 그룹, 1차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던 화요회 계열까지 넓게 결합한 것이다. 


이관술은 새롭게 결성된 조직의 지도자로 나서면서 가장 먼저 노동자 조직에 사용할 지침서를 만들었다.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에 맞춰 ‘메이데이 투쟁지침서’를 낸 뒤 ‘8.1 캄파니아 투쟁방침서’를 제작해 배포했다. 


이런 지침서는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공장세포’와 ‘가두세포’를 묶어내는 도구 역할을 했다. 이관술은 경성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누볐다. ‘변장의 달인’처럼 도착하는 곳마다 시시때때로 행색을 달리하며 조직원들을 만나고 늘렸다. 


대구지역 책임자는 정채철(1907~?)이었고, 마산지역 책임자는 함께 반제동맹 활동을 했던 권우성(1915~?)이었다. 부산지역에는 조선소 노동자였던 이기호(1913~?)와 옥견직물에 취직한 조복례(1918~?)가 있었다. 


탁월한 조직가였던 김삼룡은 금속 부분에서 이주상, 여운철(1917~?) 등을 조직했다. 경인지역의 홍인의, 김재병(?~1942), 최병희(1916~?), 이병희(1916~?) 등이 연결된다. 섬유노조는 제주도 출신 김응빈(1914~?)이 책임자였고 태창직물에서 일했던 이정남(1920~?) 등이 결합했다. 출판노조 쪽은 조선인쇄주식회사 각 신문사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했던 이인동(1909~?)이 맡았다. 이렇게 조심스럽지만 광범위한 조직 확대 과정은 걸출한 사회주의자 박헌영까지 닿게 된다.
 

▲ 1941년 권우성(왼쪽), 정재철(왼쪽) 검거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이관술, 박헌영에게 지도자를 제안

이관술은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 이관술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관술이 박헌영을 만났던 첫날은 그의 회상기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5, 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 가던 중 그해 십이월에 영등포 초입 ‘까-드’ 위에서 박헌영 동무를 만났다. 첫눈에 그는 진실에 넘치고 접하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고 또 관후한 포용력을 갖춘 것을 직감케 하였다.”


이관술이 ‘관후한 포용력’이라고 적은 부분은 이 기사의 맨 처음에 인용한 1931년 잡지 <혜성> 속 인물평과 거의 판박이다. 박헌영은 이관술보다 활동 이력이 보다 앞선 궤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관술이 탄복했던 이재유가 고려공산당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1927)일 때 박헌영은 결성과 함께 대표를 맡았던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박헌영은 이관술을 만나 운동 이력을 내세우기보다 같은 눈높이에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다. 박헌영 역시 이관술과 만난 과정을 자신이 직접 작성한 ‘자필 이력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출옥 후 이관술이 지도하는 서울의 지하 공산당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그때에는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사업을 지속한 유일한 단체는 바로 이관술과 김삼룡이 지도하는 그룹이었다. 이 그룹에 들어간 나는 그 지도자가 되었다. 조직은 서울·○○·청진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했다. 나는 이 조직에서 발간된 잡지 <꼼뮤니스트>를 지도했으며 당 재건 준비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1939년에 이미 나는 비합법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 1946.4.19 <현대일보> ‘반일투쟁의 회상’(완) 박헌영과 만남 부분

 


조직 지도자를 넘기고 이관술은 함흥으로

이관술은 박헌영을 경성을 벗어나 청주의 아지트로 내려보냈다. 박헌영이 출소한 후 일제 경찰이 감시망을 가동해 계속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40여 일을 보낸 후 경성에 올라와 이관술과 동행해 이순금이 머물고 있었던 인천으로 옮겨 갔다. 


두 사람은 인천에서 전반적인 운동 전개에 대해 상의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형성한 경성콤그룹의 규모를 공유했고 전개해왔던 활동과 향후 계획을 모두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박헌영이 들어 온 후, 두 사람의 합의 과정을 거쳐 경성콤그룹의 인적 형태가 보다 완성형으로 갖춰지게 된다. 


박헌영은 이관술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직의 지도자 겸 기관지 책임자가 된다. 조직부는 김삼룡과 장규경(1901~?)이 맡았다. 장규경은 경성출판노조 직공부장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닐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은 이다. 


기관지 출판부는 이관술이 책임자고 김순룡(1916~?)이 부원이었다. 김순룡은 김삼룡의 6촌 동생으로 이관술의 모교 중동고보의 교사였다. 인민전선부는 김태준(1905~1950)을 담당자로 삼았고 정태식(1910~?), 이현상이 참여했다. 노동부는 김삼룡, 가두부는 이남래(1913~?), 김한성, 이종갑(1916~?)이, 학생부는 조재옥(1914~?), 김순원(1917~1941)이 맡았다. 


경성콤그룸은 이 구성으로 1941년 대규모 검거를 겪게 될 때까지 국내 항일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선명하게 활동한 조직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검거를 피한 이들은 지하로 내려가 끈질기게 항거하며 해방의 순간까지 버텨내게 된다. 


이관술은 무엇보다 조직 지도자로 박헌영을 신뢰했고 본인은 다시 변장해 전국을 돌며 조직원을 늘렸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940년 5월 함경북도에서 사람이 와 박헌영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이 상황도 이관술의 회상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 오자마자 함북에서 사람이 와서 박동무를 함북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 형편이 박동무가 떠나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함북을 가게 되어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면서 나는 산중토굴을 파고 <붉은길>이란 출판물을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 조직 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관술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오갔다. 중공업과 군수산업이 커지고 있는 지역에서 노동자 조직뿐 아니라 무장한 항일혁명부대 조직까지 발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 1930년대 흥남 모습. 이관술은 박헌영을 대신해 경성을 떠나 함경북도로 향했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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