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의 삶을 바꾼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4-28 00: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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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

이관술은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를 결심하고 귀국한 후 동덕여고보 교사로 평탄한 삶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임한 첫해 이관술의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929년 11월에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0월 30일, 광주와 나주 사이 열차와 도착한 나주역에서 벌어진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이 발단이 됐다. 당시 광주중 4학년인 일본인 학생 3명이 광주여고보 3학년 여학생들이 피하는 길을 막으면서 희롱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가 분노해 다툼이 벌어졌다. 하지만 숫자에 밀려 폭행을 당했고, 급기야 주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난투극으로 이어졌다. 이를 진압한 일본인 경찰들은 발생과정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조선인 학생들만 구타해 일단락시켰다. 


다음날 31일, 박준채는 기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 중 후쿠다를 또 다시 보게 되자 사과를 요구하며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이때는 승무원이 박준채의 통행권을 뺏고 일방적으로 훈계했으며, 기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 기자는 사건을 왜곡한 편파 기사를 작성했다. 


이 사건은 11월 3일에서 12일에 걸쳐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광주지역 학생들의 거리 시위로 확대됐다.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이 커지자 일본 당국은 분쟁의 중심이었던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시위에 가담한 조선인 학생 대부분을 체포했고 공판에 회부했다. 


이 소식이 신간회 광주지회를 통해 전국으로 전달됐다. 3.1 만세운동 후 10년, 6.10 만세운동 후 3년 만에 터진, 전국 곳곳에서 1년 동안 진행되는 학생 독립운동으로 번진 것이다. 일제 당국은 지역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으로 끝난 줄 알았지만 오판이었다. 이미 항일의식이 커져가고 사상적 각성과 결사체까지 만들어지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 큰불로 당겨진 것이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들. 위 박기옥, 아래 왼쪽부터 박준채, 후쿠다

 

 

▲ 왼쪽 1929년 11월 16일 <동아일보>, 일제 당국의 보도 통제를 보여 준다. 오른쪽 1929년 12월 28일 <동아일보>, 9일 벌어진 학생 만세운동이 뒤늦게 보도됐다.

 


학생 독립운동 불길, 경성에 도착…동덕도 들썩

일제는 광주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신문보도까지 통제했다. 하지만 신간회와 청년조직을 통해 소식을 접한 지역이 늘어나면서 곳곳에서 동맹휴업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경성지역 학생들도 화답하듯 궐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12월 2일과 3일에 경성 곳곳에 ‘총궐기하자’는 격문이 뿌려졌다. 


일제 경찰은 첩보를 접수하고 종로경찰서에 수사총본부를 설치한 뒤 사전 검거를 통해 불길을 차단하려고 했다. 12월 4일에는 신간회 등 사회단체 간부와 학생 등 총 127명을 검거했고 원천 봉쇄를 시도했다. 5일 아침에도 40여 명을 추가로 검거했지만 학생들이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12월 7일과 11일 경성에서 대규모 시위가 진행됐다.


이관술이 교사로 있던 동덕여고보 4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화와 숙명, 배화 등과 동맹휴업을 하고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계획했다. 12월 9일 아침 동맹휴업을 하고 교문 밖을 나서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다. 그리고 민족계몽을 명분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던 인사들이 일본 당국의 눈치를 살폈다. 


일제 경찰의 압박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으나 결과는 순응하는 꼴이었고, 학생들의 울분을 잠재우려 애쓰는 모양새였다. 결국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휴교를 하거나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동덕도 학생 만세운동이 진행될 때 동맹휴업이 계속될 것을 우려해 겨울방학을 앞당겨 실시하면서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월 중순으로 예정된 개학 시기를 늦췄다. 학생들은 학교재단이 겁을 먹고 굴종한다는 분노로 일렁거렸다. 


경성 학생들의 2차 만세운동은 1930년 1월 15일부터 20일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여성단체 근우회(槿友會)가 앞장섰고, 경성지역 여학교 대부분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경성여학생운동’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근우회 임원 허정숙(許貞淑) 등은 겨울방학 기간 동안 경성 시내의 동덕, 이화, 배화, 숙명, 근화, 경성여자미술, 경성실천여학교, 경성여상, 태화여학교, 경성보육의 여학생 대표들을 규합했다. 참가한 학교 대표들은 약속된 날과 시간을 1월 15일 아침 9시 30분으로 잡고, 일제히 운동장에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치기로 했다. 


동덕여고보도 박선숙, 한정희, 허복록 등을 중심으로 4학년 선배들이 앞장서 독려하자 모든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고, 교문으로 향했다. 학교 교장과 일부 교사들은 선수를 치며 주동자 3명을 호출해서 꾸짖은 뒤, 설득이 되지 않자 교문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그러나 쫓겨난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구호를 외치자 잠자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로 상황이 바뀌었다.
 

▲ 1930년 1월 16일 <동아일보>, 동덕 여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교문이 막혀 울부짖었다.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실망하며 변화하는 이관술

이날 동덕여고보의 만세운동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의 거리 진출을 막기 위해 종로경찰서에서 기마경찰까지 출동할 만큼 급박했다. “학교는 경찰 출입에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각 학교 퇴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켜라!” 동덕 학생들은 구호를 부르짖었다. 그 광경을 담은 당시 동아일보 신문 기사가 남아있다.


동덕 여학생들은 운동장에 나와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종로경찰서 경찰들에게 연행됐다. 4학년 연행자 6명이 구속됐고 재판에 넘겨진 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당시 3학년 중에서도 박진홍, 이효정 등 여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의 기운을 다시 이어나가게 만들었다. 16일부터 서울뿐 아니라 평양, 개성, 부산, 함흥, 청주, 춘천 등 전국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학생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시작된 운동의 1년을 기념하는 때까지 계속됐다. 참가인원은 3.1 만세운동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총 320개 학교, 5만4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구속된 이들이 1642명이고 퇴학당한 학생은 582명, 무기정학이 2330명에 이른다.


제자들의 만세운동을 보면서 이관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관술은 후일 회고록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불같이 뜨거운 행동에 못 미치는 교사들을 보며 냉철한 반성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이관술은 ‘소위 민족주의자’라는 이들이 ‘투쟁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 학교 운영자와 교사 중 다수가 일제와 타협했고, 학교 밖 사회에서도 민족주의 계열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민족주의 계열의 소극성에 마음이 돌아선 이들 중에 이관술처럼 사회주의 계열로 이끌린 경우가 많았다. 이관술은 일제와 더욱 강력한 싸움이 필요하다고 깨달으면서 거리를 뒀던 사회주의 사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관술의 회상기를 살펴보면 당시의 고민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물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받은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인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주의자란 결국 이러한 층이 자기 위장을 하기 위한 정치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던 유물사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 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1946년 4월 11일 <현대일보> 이관술 회상기 “반일지하투쟁의 회상 1” 중에서 결국 1929~30년의 학생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좌·우합작 항일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와 근우회의 균열로까지 이어졌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 두 독립운동 진영은 항일 투쟁과 지원 방식에서 갈등이 심화됐다. 


특히 동덕여고보가 참여한 경성 여학생 운동을 지도한 근우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속속 연행돼 구속됐고, 주도권을 잃고 있었던 민족주의 계열은 이들의 항일투쟁을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민족주의 계열 중 대표적인 인물이 향후 변절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김활란(1899~1970)이다. 근우회도 결국 해산 수순을 밟게 된다.
 

학교 안에서는 독서회 지도, 밖에서는 경성반제국주의동맹

이관술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변화한 제자들처럼 사상적 성장을 하게 됐다. 이때 제자 중 이효정은 자신들이 학내 독서회를 만들 때 교사 이관술을 포섭하려 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 시기 이관술은 이미 사상 변화를 겪은 상태였다. 학생들은 이관술을 독서회를 엄호해 줄 수 있는 교사 정도로 여겼지만, 앞의 회상기처럼 고민과 실천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31년 6월 초, 경성지역 10여 개 학교에서 또 한 번 동맹휴업이 일어났다. 이때 이관술은 교사로 2년을 보내며 제자들과 교감이 커진 때였다. 더구나 울산에서 올라온 여동생 이순금(1912~?)이 실천여학교에서 동덕으로 편입했다. 이순금은 편입 후 동덕여고보 독서회에 참여했고, 남매가 살았던 종로구 익선동의 집에 동기들이 자주 오갔다. 이들이 동맹휴업을 이끌었으니 다른 교사들보다 훨씬 돈독한 관계였을 것이다. 


1931년 동덕여고보의 동맹휴업에 참가한 학생들은 학내문제 해결과 함께 일본인과 조선인 교육의 차별을 시정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그러나 학교 측의 대응은 1년 전과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일제의 압박에 눌려 학생들을 통제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동맹휴업이 왜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손병희 타계 후 새롭게 교주가 된 이석구와 그의 아들 이능우 그리고 교장 조동식이 종신 이사로 학교를 운영했는데 재단 이사장의 전횡이 심했다. 학생들은 재단을 향해 학교 운영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동맹휴업에 들어가면서 학생들은 부모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냈다. 일본인 학생들에 비해 형편없는 조선인 학생의 교육 현실을 설파했고 학교 건물의 중축 요구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일제 경찰의 교내 출입금지를 비롯한 항일 요구를 포함해 동맹휴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은 동맹휴업을 주도한 3,4학년 참가자의 대부분인 100여 명에게 제명처분을 내렸다. 그중 박진홍과 김운라 두 명은 퇴학, 이효정을 포함해 세 명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자 1,2학년까지 휴업에 동참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커졌고 신문에서 주요 사회문제로 연일 보도했다. 


이관술은 동료 교사 신명균 등과 함께 학생들 편에서 앞장섰다. 교사들이 학생 처벌을 풀라고 요구하며 전원 사직 입장을 밝힐 때도 주도했다. 학교 측도 점차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는지 교원의 사직을 반려하고 제명된 학생들을 복교시키겠다고 방침을 전환했다. 교주 이석구는 동대문 근처 창신동에 새롭게 부지를 마련해 교사를 신축하겠다는 대안을 밝히면서 학생들의 요구도 대폭 수용했다. 


이제 퇴학과 정학을 받은 학우들에 대한 구제가 마지막 쟁점이 됐다. 이효정을 비롯한 주도 학생 10여 명은 6월 25~26일 이틀에 걸쳐 교주 이석구와 교장 조동식의 집 앞에 찾아가 세끼를 굶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날도 경찰이 출동해 단식 중인 학생 중 이효정과 이종희 등 5명을 체포해 갔다. 최종적으로 모든 학생의 처벌을 무효로 하는 결정을 내린 후 전원 등교가 이뤄졌다. 무려 한 달이 걸린 휴업이었다. 

 

▲ 1931년 6월, 동덕 동맹휴업 동조 교사들 총사직 선언(왼쪽)과 학생 단식농성(오른쪽)

 

 

▲ 동덕여고보 1932년 졸업앨범.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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