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의 끈이 된 차(茶)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1-09-28 00: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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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인연(因緣)을 말하면서 “이 세상 아무리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인연으로 일어나 인연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멸한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다. 인(因)이 결과를 산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씨앗과 같고 연(緣)은 인을 도와주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밭과 같다 하겠다. 이렇듯 인연이란 존재(存在)의 넓고 깊은 바다에서 출렁이는 물결 같은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이 인연의 끈을 스스로 만들며 그 속에서 얽히고설킨다. 내가 뿌린 인연의 씨앗은 반드시 거두게 되며 거부할 수도 잘라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고 한다. 


내게 있어 차(茶)는 인연의 끈과 같고 인(因)을 만들어내는 밭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차가 맺어준 좋은 인연들은 시골에 스며들어 살고 있는 은퇴자에게 황혼의 아름다움에 푹 젖어 살게 해준다.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온 차 친구(茶朋友)들, 그 옛날 어느 가을 지친 몸을 쉬게 해주며 차 한 잔 나눴던 지인, 밤을 지새우며 차를 마시고 담소했던 제자들, 내가 시골에서 외롭지 않을 만큼 틈틈이 찾아온다. 지난날 인연 한 조각 붙들고 그리워하며 살아온 이들이다. 다시 그 끈을 붙들고 더듬어 온 사람들, 다 소중한 인연들이다. 차(茶)가 끈이 된 인연들이다. 나이 들어 내가 드리는 기도는 우연이나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축복해 달라는 것이다. 젊은 후배가 찾아오면 빼먹지 않고 좋은 인연의 씨앗을 심으면서 살라는 당부다. 사람이 잘살았는지 못 산 것인지는 나이 들어 그 집 사랑(舍廊)에 오는 손님을 보면 안다고 했다. 


오래전 중국 베이징에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상황 속에 살고 있던 몇 사람을 우연히 찻자리에서 만났다. 이국땅 외로운 곳에서의 만남이어선지 우리는 근방 친근해졌다.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고 먼 곳으로의 이주와 함께 헤어지게 됐다. 비록 몸은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리움에 쉬 잊히지 않고 안부를 전하고 살았다. 주로 차를 마실 때면 생각이나 전화를 하고 좋은 차가 있으면 보내주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 고국에 돌아와 살고 있지만 가끔 만나 추억 묻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인연의 끈이 된 차(茶)의 고마움을 말하곤 한다. 


지난해에는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우연히 만났다. 14년 전 중국 베이징에서 우연히 차(茶)를 찾는 사람을 만나 차청(茶城)에 데려다주고 함께 품차(品茶)하며 차(茶)를 구입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래서 기억하고 인사를 한 것이다. 아마도 차가 아니고 그냥 같은 한국인으로 만나 밥 한 끼 먹었다면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차(茶)가 맺어준 인연은 참으로 다양하고 신기하다. 


그래도 한가위(秋夕)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 멀리 있는 딸이 보고 싶은 때다. 며칠 전에는 5년 만에 먼 곳에서 찾아온 친구를 만나 이틀 밤이나 함께 했다.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는 안 했지만 우리는 눈빛으로 아픈 가슴들을 어루만졌다. 친구가 떠날 때 보온병에 보이차 숙차를 정성껏 우려 담았다. 가다가 휴게실에서 마시면 홀로 가는 가을 여정이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에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이연실의 가을 노래 ‘여수’를 카톡으로 보냈다. 다음날 친구는 금강 휴게실에서 내가 준 보이차를 마시며 노래를 듣다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깨 위로 가랑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과 만남 속에서 질긴 인연의 끈으로 한 폭의 그림을 수놓고 가는 것이다. 이런저런 인연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시점 속에서 차(茶)로 맺은 좋은 인연을 거두며 황혼을 아름답게 수놓았으면 좋겠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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