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가 부른 가을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21-09-28 0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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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상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을 문이 열린다. 아이는 수줍은 웃음을 나무 뒤로 숨기며 짧은 머리를 찰랑거린다. 술래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입을 막으며 아이는 숨을 죽인다. 웃음을 참는다. 그런 아이들 머리 위로 가을은 내려앉고 들녘의 벼들은 황금빛 물결로 바람을 불러들인다. 가을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고 푸른 하늘을 물고 새들은 기꺼이 그들의 풍경이 되어주는 오후. 태화강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계절이 있다.


가을이다. 갈대가 바람을 노래하는 순간 햇살은 눈 부시고 코로나19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견디면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다 지친 사람들은 강으로 산으로 숨 쉴 곳을 찾아 길을 나선다. 자그마한 텐트 하나로 강가에서 가족들은 평화롭게 가을을 즐기고 있다. 강을 바라보면서 나무 아래 의자를 깔고 책을 읽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 여유 있게 강변을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 마치 여기가 누에보다리가 펼쳐진 론다의 들녘은 아닌지, 착각할 만큼 백일홍은 아름답기만 하고.


코로나19로 어두웠던 시간을 우리는 잠시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내려놓는다. 나무 그늘에 앉아 헤르만 헤세가 부른 가을을 읽으며 불만스러웠던 것들은 유혹적인 가을의 색채로 대신 위로한다. 은빛 물결로 갈대는 바람을 노래하고, 계란 흰자처럼 흰 구름은 하얗게 하늘을 떠다닌다. 이제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온 아가씨처럼 볼이 발그레한 풀밭의 여인들. 땀을 뻘뻘 흘리며 나룻배를 조립 중인 젊은 청년들. 허리가 구부정하지만 열심히 게이트볼 경기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 마스크는 벗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 풍경이면 아름답지 않은가. 도심 한가운데서 가을을 만끽하는 사람들 사이로 보고픈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고 어제를 다시 불러 보듯 전화기로 형제들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언제쯤 한자리에 모여 오순도순 차 한 잔 나눌 수 있을지? 혼자 걷는 태화강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는다. 백일홍 너머 은빛 물결을 자랑하는 갈대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홀로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가 태화강을 물고 날아오른다. 볼 수 없어 보고픈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 가지만 비 온 뒤의 길은 항상 질척하지 않던가. 힘든 시간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서로의 살을 베고 베이는 것보다 한 걸음 물러서 그리움을 키우는 게 나의 한가위다. 해가 넘어간다. 빨갛게 심장이 물들어 가는 강에서 나는 사라진다. 나는 살아난다. 나는 살아 내기로 한다.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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