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양심적인 정치 지도자 5위로 뽑혀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9-29 00: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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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9)

미군정의 허가 아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는 굴욕을 겪었지만 임시정부의 귀환으로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대부분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경합을 벌이게 된다. 해방정국은 지난 3개월 동안 건국준비위원회를 바탕에 둔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앞장서 친일파와 부역자들이 보호막을 만든 한민당, 미군정을 등에 업고 독립촉성회란 정치기반을 만든 이승만, 전국 대중조직과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한 조선공산당이 가장 큰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 1945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

조선공산당이 바라본 임시정부 귀환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귀국에 앞서 두 가지 입장을 놓고 고심했다. 첫째는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과 귀국하는 중경 임시정부가 일 대 일로 협상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이다. 둘째는 이미 이름만 남고 존립 기반이 희박해진 인민공화국은 폐기하고 속속 결성되는 전국단위 대중조직을 기반에 놓고 주요 정당을 묶어내는 통일전선 구축이었다. 대중 여론의 무게는 첫 번째 안에 더 쏠렸다. 


그래서일까. 김구를 비롯해 임시정부 1진의 귀국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도 조선공산당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관술이 기자들과 만나 나눴던 인터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관술은 먼저 조선공산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개인 의견이라는 것을 밝힌 뒤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종래 상식적인 견해에서 아직 더 무슨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국내와 해외의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을 규합하야 민족통일정권을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보편된 정치 상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경임시정부의 성격을 아직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음으로 앞으로의 귀추를 살펴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요약하면 원론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통일전선으로 정부를 수립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임시정부 측과 향후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환영대회를 일주일 앞둔 12월 12일 박헌영이 공식적인 합작정부 수립에 대해 공식 제안한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그리고 파시스트(국수주의자)를 배제한 좌우익 세력이 반반으로 세력 균형을 이룬 합작정부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담화 속에서 임시정부에 대해 다음처럼 송곳 같은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조선의 인민 등 노동자대중과 친히 접촉하여 조선인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필요가 있다. 그분들은 반일투사인 것이 분명하니 나와서 조선민중과 접하되 평민의 한사람으로서 허명무실의 잠깐 맡겨두고서 움직임이 어떠할는지.” 


다시 말해, 항일에 앞장선 독립운동은 인정할 수 있지만 노동자를 비롯해 조선민중을 중심에 둔 정부수립에 나서야 한다는 충고였다. 특히 헛된 이름(허명)과 실상이 없는(무실) 관직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뼈를 때리는 수준이었다.
 

▲ 1945년 11월 19일 <자유신보> 중경 임정에 대한 이관술 담화

 

▲ 1945년 12월 13일 <신조선보> 박헌영, 통일전선과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 발표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의 밀월 관계와 균열

김구를 중심에 둔 중경임시정부는 조선공산당과 일 대 일의 정부수립 논의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충고 섞인 제안을 일갈하면서 중경임정의 법통을 시인하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기존 임정의 부서와 요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몇 개 부서를 늘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에게 내어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에 대한 명백한 거부 의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공산당과 임정이 틀어지는 배경에는 김구와 이승만의 밀월 관계가 깔려 있었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통령으로 1925년 3월 탄핵당한 흑역사가 분명히 있었지만 1941년 중경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재결합한다. 탄핵이 될 때는 미국에 머물면서 임시정부에 결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 것과 미주지역 교민들의 독립운동지원금을 상해로 보내지 않고 임의 유용한 이유가 컸다. 


반대로 김구는 중경임시정부의 주석을 맡은 뒤 이승만을 대미외교 창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주미외교위원장 직위를 앞세우다 재미 한인사회와 마찰을 빚을 때에도 이승만을 옹호하면서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밀월 관계는 임시정부가 미군정과 귀국 협상이 시작하면서 조금씩 균열의 조짐이 시작된다.


먼저 이승만은 임시정부 귀국이 정부 환국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기자들을 통해 언론에 보도된 이승만의 입장은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중경임정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독립촉성회중앙협의회를 구성해 정당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이승만의 행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쪽은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어떤 형식이든 기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가 수립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구와 이승만은 수 차례 회동하면서 입장 차이를 줄여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간극은 더 벌어졌다. 따라서 이승만이 유지해온 ‘중경임정 지지’와 ‘독촉중심 정당통일’로 걸쳐 놓은 이중적인 행보 역시 제동이 걸리게 된다.
 

▲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가운데). 이승만, 미군정 하지 사령관과 함께 찍은 사진

 


정치세력에 대한 민심을 보여준 첫 여론조사 결과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는 1945년 10월에 잡지 <선구>를 창간호로 발간한 중도보수 성향의 단체 선구회(先驅會)를 통해 이뤄졌다. 이 단체는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 달 동안 각 정당과 언론사, 단체, 학교 등 105개 곳에 설문지를 보내 답변을 받는 방식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설문 대상은 이른바 여론 주도층으로 국민여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없으나 해방 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도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로 선구회가 밝힌 조사 목적은 ‘현재 조선에 있어 인물이 없다는 비난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설문 항목은 다음과 같다. 1호)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2호-1) 희망하는 정부 조직 형태, 2호-2) 내각 조직 후보, 2호-3) 과거 조선 혁명가로 총 4가지다. 그중 1호 조사에서 ‘양심적인 지도자’에 추천된 인물 자격은 “1)국제정세에 정통하고, 2)조선 사정에 통달하고 3)가장 양심적, 4)가장 과학적, 5)가장 조직적, 6)정치적으로 포용할 아량을 가질 것’이었다. 


이관술은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에서 5위를 기록했다. 여운형(33%),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다음으로 12%를 받았다. 이관술 뒤로는 김일성(9%), 최현배(7%), 김규식(6%), 서재필(5%), 홍남표(5%) 순서다. 이 조사에서 지지율의 총합이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각 조직 후보를 묻는 설문에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431표로 가장 높았다. 김구가 293표, 여운형이 78표 순이다. 이 결과는 건준과 조선공산당 역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를 발표할 때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천한 영향 때문이었다. 여론조사가 시작된 초반에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주목을 받았으며 미군정의 지지라는 후광 효과도 작동했다.


이관술은 내각 후보 중 경제부장에서 백남운(215표)에 이어 98표로 두 번째를 기록했다. 조선공산당에서 총무 겸 재정부장을 맡아 후보로 뽑힌 셈이다. 그리고 여운형, 이승만, 박헌영, 김구 순서로 뽑힌 ‘과거 조선혁명가’ 설문에서 열한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 잡지<선구> 1945년 12월호,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KBS 인물현대사 65회, 2005년 1월 방영)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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