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가을-강진에서 일주일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 기사승인 : 2021-09-27 0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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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훌훌훨훨’
▲ 강진 도암면 백련사.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백련사는 다산초당에서 이십 분 정도 걸리면 볼 수 있는 사찰로 누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아직 배롱나무꽃이 남아 있었다.

수년 동안 화제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사회적 이슈가 됐던 소설이 <82년생 김지영>이다.여주인공 지영은 육아 우울증인지 헤리 장애인지 모를 정확한 진단 없이 항우울증과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한다. 여느 집과 같이 남동생을 귀히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고 직장에서는 여성으로, 다시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는, 한국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면 그것이 차별인지조차도 모르고 살아왔을 일들을 겪는 과정이 서술돼 있다. 70년생 김지영은 비슷하게 공감할 테고 60년생 김지영은 공감이 그다지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차별인지 부당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고.


월, 화, 수, 목, 금, 토, 일, 6박 7일. 그리고 추석이 이어진다. 객기 무모, 어느 단어가 더 잘 어울릴까. 명절을 앞두고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챙겨야 할 가족들도 많아 분주한 두 여인이 길을 나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27년간 하고 퇴직 전 잠시 휴직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있는 이번 동행의 그녀는 72년생이다. 영화 속의 일들과 다 비슷한 과정을 겪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일을 놓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로 이른 퇴직을 고려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라는 특별한 배경은 있지만 세상은 그래도 많이 좋아져서 SNS에 올라온 추석 풍경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사람들의 공감으로 웃프지만 가장 핫했던 문구가 있었는데 ‘며느리는 친정으로 아들은 시댁으로’라는 내용이었다. 그간 일방적으로 시댁에 가서 차례 준비를 하고 가족들 음식 뒤치다꺼리하고 가족 간의 화합이 무색하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명절을 마치던 여성들에 대한 무관심이 조금씩 이해와 공감으로 나아지고 있는 걸까. 여행 내내 주변인들은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줬다.

 

▲ 강진만의 가장 아름다운 미항인 마량항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고 둘레길도 잘 정비돼 있다.

그녀와 나는 전라도를 좋아했는데 마침 강진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인 FUSO(feeling up stress)를 알게 돼 재빠르게 신청했다. 코로나가 사그라들지 않아 코로나 PCR 검사 음성확인서와 백신 2차 접종 확인서도 첨부해서 안전함을 기했다. 남도라는 너르고 고즈넉한 들판도 좋았고 비교적 길게 머물 수 있도록 6박이라는 매력적인 조건이 선택하는 데 한몫을 했다. 자율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6박의 조식과 2끼의 저녁을 제공받을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물론 근교 목포나 해남, 완도도 한 시간 이내면 이동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머무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한 여정이다.

 

▲ 전라병영성은 조선 1417년 마천목 장군이 축조했고 수많은 역사와 일화 속에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로 존속돼 왔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불타고 곧 이은 갑오경장의 신제도로 폐영됐다.

6박 7일 일정 중 한 집에 다 머물러도 되고 3박씩 나눠 묵어도 돼 우린 3박씩 다른 곳에 머무는 것으로 선택했다. 첫 번째 도착한 집은 강진 신전면 사초리가 고향인 김선화 님 댁이었는데 남도의 너른 품에서 살아와서 그런 건지 요즘 보기 드물게 편안한 분이었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병어찜부터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만든 제철 반찬을 정갈하게 해주셨다. 주인과 분리된 2층 공간이라 크게 불편함이 없었는데 오래 머무는 만큼 가족 수와 상황에 맞게 묵을 집을 잘 고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강진에서 해남은 삼십여 분이면 도착하는 곳으로 미황사나 도솔암 등 절경의 사찰을 마주할 수 있다. 사진은 도솔암 가는 길.

별다르게 딱히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온 목적이 아닌 그녀와 난 다른 요일의 아침이 오면 느긋하게 일어나 마음에 닿는 외딴 도시로 향했다. 목포, 해남, 완도, 마치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무것도 궁금한 것이 없다는 듯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서 익숙하게 머물렀다. 다만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때마다 곁에 있는 서로에게 가끔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아무도 그립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 슬퍼요.”


“정말요? 그건 정말 슬픈 일이네요.”


조금 일찍 눈이 떠져 아침 산책을 나섰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한시(漢詩) ‘애절양’에 나오는 곳인데 조선 후기 백성이 과도한 군정으로 인한 고통을 못 견뎌 음경(성기)을 자른 것을 보고 슬퍼하며 지은 시다. 당시 조선 삼정의 횡포를 알 수 있었던 시로 갈밭 아낙이라는 문장의 갈밭이 바로 남포다.


탐진강 아홉 구비 강물이 만나 잠시 머물다가 다시 바다로 흐른다는 남포는 강진에서 가장 걷고 싶었던 곳이었다. 아침 산책길 수백 수천 수만 마리 생명체 중 나 하나 인간. 푸드득 고니의 몽환적인 펄럭임 사이로 우주에 불시착한 느낌으로 섰다. 사이사이 물길을 내어 보내느라 모서리를 잃은 갈대 섬 위로 바람 휘휘/ 마음 흐르고 바람 흐르고 시간 흐르고/ 사람 흐르고 강물 흐르고 기억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너무도 자연스러워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흐른다는 것은. 흘러서 안도하고 흐르니까 서늘하다. 


까아만 밤 함몰의 치명과 빛 퍼지는 아침 고요의 평온, 그 경계에서 살아있는 흐르는 모든 생명들.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돌아 나오는 길 남포 마을에 잠시 들러 세월을 읽어본다. 한때는 바다에서 채취한 물품들로 걱정 없이 부유했다던 남포 마을에는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만이 지금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분들의 표정은 순하고 넉넉했다. 강진에서 다산 정약용과 김영랑을 빼면 할 이야기가 없다지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마을 골목골목에 스며 있다 


“선생님 그런 교과서 역사 말구요. 아무도 모르는 강진 이야기해주세요.”


“그럴까요. 그럼 재미난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정말요? 재미 없으면 안 돼요.”

 

▲ 탐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강진만 남포의 갈대밭.

강진의 영랑 박물관에 잠시 들렀을 때 도슨트 선생님이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창조, 폐허, 카프 낯익은 단어를 읊으며 문학 사조 설명을 한다. 집중하지 못하고 눈알을 굴리다 말씀드리니 기다린 듯 김영랑과 무용수 최승희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 도슨트 선생님. 아는 듯 첨인 듯, 맞아요. 역시 사랑 이야기가 최고지요. 웃음으로 마무리하고 박물관을 나오며 그녀와 나는 낮게 말을 이어갔다. 


“아, 그런 목숨 건 사랑, 목숨을 걸어야 사랑이지.” 이십대였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우린 너무 많이 다 알고 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한 여인 때문에 자살하려 했던 서정시인의 연약함이 과연 그녀를 세계적인 무용수로 키울 수 있었을까. 그녀가 그와 이뤄지지 않은 건 어쩜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82년생 김지영도 72년생 김지영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 강진 오일장은 2일 7일에 열린다. 갯벌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팔고 있는 어르신들,

수평으로 펼쳐진 너른 남도의 품이라 그랬을까. 여행이 시작될 때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간간이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했던, 무엇이든 그 하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집착했던 한 시절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베티블루 37.2 


“창밖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하루는 북쪽에서 하루는 서쪽에서. 인생이란 그런 거야. 우린 늘 그 속에 있지.”


강진에 처음 도착한 날 들녘에 남아 있던 여름의 잔열은 식고 하루하루 벌판은 가을이 조금씩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강진을 떠나는 날 차가 밀릴까 조금 이른 시간에 짐을 챙겼다. 한적한 다산 마을에는 아침의 차가운 기온과 공기 중의 물기가 만나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순천 하동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위에도 비상등을 켜야 할 만큼 앞이 보이질 않았다. 꿈길 같은 몽환의 안갯속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운무가 걷힌다. 앞에 터널에서 사고가 났다며 정체를 알리는 교통상황 전광판이 반짝였고 차들이 멈추고 서고를 반복했다.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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