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추 우편마차로

배성동 시민/소설가 / 기사승인 : 2021-09-06 0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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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20)

▲ ©문정훈 화가


몽구가이 비석걸 대호

11월의 연해주 남부 날씨는 한겨울이었다. 피의 계곡을 빠져나온 행렬은 몽구가이강(현재 지명은 바라바샤강) 상류에서 얀콥스키와 헤어졌다. 얀콥스키는 그가 운영하는 시지미농장으로 가고, 행렬은 약종상이 있는 독가촌(압치니꾸바 마을)으로 향했다. 잣나무며 삼나무, 자작나무가 빼곡한 타이가는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잣나무 사이로 아슴푸레 비치던 햇살마저 사라졌다. 


행렬은 만주족이 세운 비석걸에서 잠시 쉬었다. 이반은 낡은 가죽 배낭 속에서 연초를 꺼내 곰방대를 물었다. 힘들게 넘어온 분수령 국경지대가 올려다보였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국경고지는 만주 쪽에서 볼 때는 용트림하는 산군인 반면에 이곳 연해주에서 보면 그저 일자로 연등한 산군에 가깝다. 이반은 로씨아 지도를 펼쳤다. 예상한 대로 국경고지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고지가 분수령(372미터)이다. 예전부터 분수령은 침략자들의 루트이자 만주상인들이 줄을 서 넘던 교역로였는데, 그 첫 마을이 독가촌이다. 분수령 북쪽은 ‘뽀로가야산 산맥’이고, 두만강 남쪽은 ‘비소트나야산맥’이다. 대청제국 만주 쪽에서는 ‘훈춘산맥’으로 부른다. 핫산군과 나데진스키군의 접경지에 위치한 뽈로가야산(해발 741미터)은 분수령에서 북쪽으로 약 15~20킬로미터 떨어졌고, 두만강은 약 17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했다. 조선은 산맥을 중심으로 분기점을 나누는 데 비해 로씨아는 강의 지류를 중심으로 하는 편이다. 뽈로가야 산맥에서 동으로 흐르는 강이 보라소프카강이고 차피고우와 크로우노프카가 있다. 동남쪽 기슭으로는 암바강(자나드보롭카 안산마을)과 바라바샤강, 그리고 지류인 뽈레레치카강이 흐른다. 비소트나야산 동쪽으로 나르브강이, 동남으로는 아지마강과 라자노프카강이 흐른다. 조선 북부의 산천에 비해서는 완만한 편이긴 해도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지형이다. 이반이 연해주에 정착하게 된 것도 고향 같은 지형 때문이었다. 


곰방대를 털고 일어선 이반은 제실 기단으로 걸어갔다. 이곳을 드나들던 만주족이 세운 허름한 통나무 제실 안에 비석이 모셔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려 범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제당 언덕 위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물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튀어나온 바위인 줄 알았는데, 웬걸 바윗덩어리에서 광채가 났다. 대략 오륙십 보 거리에 있는 이 물체는 꽈리를 튼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무심결에 움직이는 꼬리를 본 이반은 이 물체가 범임을 직감했다. 오랜 경험으로 보아 그것은 이 땅의 산신령, 그것도 범상치 않는 대호였다. 그동안 산중에서 여러 범을 마주쳤지만 이만큼 큰 대호는 일찍이 보질 못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대호가 먼 순찰길에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멀리 조선에서 온 왕대일지도 모른다. 


멀찍이 떨어진 행렬은 비석걸에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반은 기단 모퉁이로 다가갔다. 멀기는 했지만 바위 위의 대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반은 방아쇠 잠금장치를 풀었다. 사냥꾼이라면 탐내는 고가의 용골을 포기할 순 없다. 하지만 이렇게 큰 대호를 잡는다는 것은 산신령의 노여움을 받을 수 있다. 물러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퇴양난으로 망설이던 이반은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위중한 부상자가 있는데 해악이 될 수 있다. 대호 앞에서 등을 보이는 것은 곧 죽음이다. 이반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뒷걸음을 했다. 한 발 한 발 물러날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대호는 물러나는 이반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대호가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물러난 이반은 행렬과 재빨리 비석걸을 빠져나왔다. 그때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약종상은 고려인 집단농장 인근에 있었다.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별동대들은 대나무숲 박쥐동굴에 숨어 주변 정탐에 나섰고, 이반은 아픈 두 사람을 데리고 약종상으로 갔다. 약종상에 들어서자 가시어미의 며느리가 맞았다. 이반과 함께 노일전쟁에 함께 참전한 그녀의 남편은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 석이 상처를 본 가시어미가 고개를 저었다. 벼락틀 쇠창살 녹물이 상처에 파고들어 피부발진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반, 한시가 급한데 큰일이요. 뱃속에 퍼진 녹물을 빼내야 해. 호랑이나 곰 발톱에 입은 상처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여럿 봤다오.”


“가시어미, 어찌 손쓸 길은 없겠소?”


“연추에 있는 조선의도 이런 큰 부상을 치료할 수 없다오. 군부대에 부탁해서 군의가 집도를 하거나 아니면 도시로 나가야 될 거요.”


이반은 여러 고민을 했다. 로씨아 군부대에서 고려인 총땡이를 받아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젊은 청춘남녀를 이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병원이 있는 도시로 이송해야 할 것 같았다. 이반은 대나무밭 박쥐동굴에 숨어 있는 권취문을 찾아갔다. 석이를 혼자 두고 떠나는 마음이야 아프지만 기울어 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이역만리를 찾아온 별동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연추의진 사령을 만나 홍범도 부대에 공급할 무기를 협상해야 하는 임무를 지켜야 했다. 둘은 헤어지면서 지참물을 주고받았다. 이반은 로씨아 지도를 건넸고, 권취문은 석이 치료비로 쓰라며 여비를 이반에게 건넸다. 이반은 석이를 실어 나를 마차를 구하러 곧장 몽구가이로 내려갔다. 마침 고려인 집단농장에서 마차를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치료는 가시어미가 맡고 있었다. 며느리는 계집아이와 함께 약을 달였다. 그날 저녁 무렵에는 발열과 기침 증세를 앓는 만주족 환자가 찾아왔다. 며느리 말로는 인근에 사는 만주족이었는데, 검은담비를 팔기도 했다. 그들은 박쥐나 천산갑, 밍크를 약재로 사육하는 사람이었다. 만주족들은 쥐 태아 같은 이상한 음식을 먹곤 했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발열과 기침 증상을 보였다. 다음날 아침, 고려인 마부가 모는 마차가 왔다. 이반은 석이와 쇼냐를 마차에 태우고 쌍성자(雙城子,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 ©문정훈 화가

 


1907년 연추 우편길

박쥐동굴을 나선 별동대들은 몽구가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연추의진이 있는 연추까지는 꼬박 이틀은 걸어야 했다. 로씨아 기병대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오솔길을 찾던 별동대들은 유독 진달래가 많은 우편길을 열었다. 이 길은 노군 기병대들의 군수물자 보급로이자 우편마차 길이다. 조선과 청국, 로씨아 3국의 국경지역인 이곳은 극도로 예민한 지역이었다. 권취문은 이반이 준 로씨아 지도를 살폈다. 지도에는 20여 군데의 개척 고려인촌들이 표시돼 있었다. 대략 오십 리에서 백 리, 많게는 수백 리 간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이들 마을 지명 대부분은 만주족들이 불러온 그대로 사용했다. 목허우(포시에토, 조선인은 보시예트라 부름), 출레이(슬라비얀카), 연추(크라스키노), 몽구가이(바라바샤),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쌍성자(雙城子 혹은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아랫강동(수분하강 동쪽 방향)의 하마평(라즈돌리노예) 등이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국적으로 귀화한 원호인과 미귀화한 여호인으로 나뉘었다. 원호인은 주로 추풍사사(황거우 차피고우 크로우노븝카), 아랫강동(수이푼강 유역 고려촌 시넬리코프), 허커우(코르사코프카), 푸칠로프카(육성촌 서부)에 살았다. 머리가 비상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고려인 중에는 사회주의 노력영웅도 있었다. 특히 조선 외교권의 상실로 국적이 모호해진 여호인들은 점차 연해주 극동해안 올가, 테르네이 등 연해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1904년 조선이 외교권을 잃고, 곧이어 노일전쟁이 터지면서 고려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로씨아 군인들은 일부 친일 조선인을 불온세력이나 스파이로 몰아세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시와 통제 속에서 지내게 했다.

신작로에 나타난 호랑이

나르바강 하류에서 금 채굴을 하는 고려인들을 만났다. 고려인 채굴꾼 말로는 금이 나오는 곳을 소금강 혹은 금샘이라 했다. 한 마장을 가자 신작로를 닦는 흰옷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강을 연결하는 고려인 노동자들로 인근 마을(브루시아)에서 부역 나왔다. 두만강에서 쌍성자를 잇는 길이었는데, 앞으로 철도역(밤부르역)이 들어설 곳이라 했다. 그들은 돌을 깨고 흙 자갈을 까는 노동을 했다. 한 켠에는 모닥불을 켜 놓고 고려인 노동자들에게 먹일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남루한 흰옷에 흙이 묻고 두건이나 모자를 썼고, 하나같이 힘들어하는 고역의 모습이었다. 별동대들을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가까운 오솔길로 이동했다. 그때 황백색 호랑이 한 마리가 노동자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백주대낮에 나타난 호랑이는 너무도 느긋했다. ‘자네들, 모두 제자리에 그대로 있어. 까불면 죽어.’ 놀란 노동자들은 일제히 엎드려 경배를 올렸다. ‘위대한 왕이시여, 부디 그냥 지나가십시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사람, 바닥에 엎드린 사람, 허리를 수그려 눈을 감은 사람 등 제각각이었다. 


별동대들은 쉬지 않고 걸어 이수를 줄여나갔다. 노군 패잔병이나 만주족 건달패를 피하려고 애썼다. 아지미(Adimi)에는 노군 보병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보병 초소를 우회해 라자노프카강 기슭을 파고들었다. 아지미는 상아지미(뽀이마)와 하아지마(로마쉬카) 두 고려인촌이 있었다. 만주족들이 사는 아지미 외곽에는 술집, 개장국집도 보였다. 고려인들은 그저 부스러기 돈냥이나 벌었고, 큰돈은 밀수 아편이나 야바위판을 벌인 만주족들 차지였다. 


목적지인 연추 지신허가 가까웠다. 보라도브강 기슭에서 숙영한 별동대들이 연추(煙秋) 지신허에 도착할 무렵은 오후였다. 먼저 와 있는 김문술 산포대 대원들이 반갑게 맞았다. 권취문은 집단농장 장로와 김문술을 따라서 마을로 들어갔다. 조선인만 사는 마을 중간에는 광장이 있었고, 판자로 지어진 성당신자학교와 예배당과 붉은 벽돌로 지은 연추도회소(煙秋都會所)가 있는데, 이것은 목허우(포시예트) 면소였다. 이곳의 최고지도자는 로씨아 관헌으로부터 연추지역의 조선인 통솔권을 위임받은 최재형 도헌(都憲)이었다. 고려인이 사는 집은 흙집이거나 억새지붕으로 역은 판자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내부는 지저분했다. 지신허(현재 지명은 비노그라드나야)는 1864년 연추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긴 고려촌이었다. 상지선허는 삼거리, 중지신허는 세기둥, 하지신허는 가채기라고 했다. 별동대들은 연추 동산 노보(현재 크라스키노) 언덕에 올라섰다. 연추만(현재 엑스페지치야만)과 지신허 그리고 슬라방카 해안의 동해가 한눈에 보였다. 멀리 두만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청나라 만주로 넘어가는 국경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만주말로 툰구스(솔로비요브)라는 만주 접경지역은 마적단이 자주 나타나는 지역이었다. 권취문과 별동대 대원들은 조국 산천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혔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권취문은 연추 장로의 안내로 전재익 사령과 이범윤 의병장을 만났다. 권취문은 북청에서 일어난 홍범도 산포대의병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무기 공급을 요청했다. 별동대들은 집단농장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에는 조국을 왜놈들에게 강탈당하고 망명 생활하는 우리 동포들이 다수 있었다. 안중근, 최기봄, 홍지운, 한현동 용병들이 별동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들은 무장투쟁 의지가 불타는 조선인 정치 망명자들이었다.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목도한 안중근은 부산에서 기선을 타고 이곳에 망명 와 있었다. 안중근은 다음 해인 1908년 동의군 우영장 신분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펼친다. 예측할 수 없는 망명객은 삶과 죽음의 거리가 가까이 있었다.

조선범 망명 보고서 편 끝.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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