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세기, 시민문화권 보장을 위한 용어 바로 읽기 ⑦ 공정(公正, fair)

이강민 울산민예총 정책위원장 / 기사승인 : 2022-01-11 0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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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 최고의 가치는 ‘공정’(公正, fair)인 듯하다. 하지만 공정이 과연 비뚤어진 우리 사회를 바로잡는 ‘정의’(正義, justice)의 칼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왜냐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조건을 도외시한 채, ‘공정’을 강조하는 것은 기득권의 특권을 더 강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공정은 삶을 위한 튼튼한 동아줄이 아니라 덫이 되고 만다. 이 때문에 마이클 센델은 공정이 정의라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는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하는 가치다. 즉 정의는 공정을 포함하며, 우리 모두에게 정당한 가치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는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절차상의 정의다. 이때 정의는 절차상 공정한 규칙만 지켜진다면 선수의 조건이 헤비급이든 플라이급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정’은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능력주의는 능력이 있으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능력은 날 때부터 가지고 온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개인의 능력은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은 어려서부터 사회적 자원을 얼마나 많이 활용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말은 완전히 사라졌다. 과거에는 가난한 아이들도 죽도록 공부해서 학력고사 점수를 잘 받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부모의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자녀의 명문대 입학 순위를 결정한다. 이것은 적자생존의 경쟁과 시장의 원리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가 내면화된 결과다.


따라서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가장 잘 표현한,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공한 엘리트들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오만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엄청난 세금 낭비를 하고도 성과급 잔치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민중을 개·돼지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나 있다. 


하지만 이 분노는 이 삐뚤어진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사람들은 공정치 못한 것에 분노하지만, 결국 능력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엘리트의 자리에 내가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정을 위해 기득권이 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줄 테니, 열심히 노(오)력해서 성공해라. 그리고 성공하지 못하면 네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이 모자란 것이니 남 탓을 하지 마라”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아래서 실존적 경험은 부자든 빈자든 가리지 않고 위계적인 질서와 문화를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는 당연히 상위계층이 하위계층에 대한 무시를 정당하게 만든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위계층(보통사람들)이 이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있다.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오랜 실존적 경험으로 인해 피식민지 민중들이 갖게 되는 인간상은 식민지배자의 그것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이 말은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온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는 그 지배자를 동경하고 그와 동일해지기를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주보다 마름이, 일본 경찰보다 친일경찰이 더 악독했다는 증언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공정’의 덫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나부터 우리 사회의 ‘상식’과 맞짱 뜰 때 가능해진다. 용어는 항상 주류사회의 가치를 반영한다. 공정, 정의, 참여와 같은 용어의 진위를 따지려거든, 가장 먼저 그 용어가 시금치처럼 무조건 몸에 좋다는 상식이 아니라, ‘누구에게 이익인가?’라는 가치론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정의를 동경하는 사람은 그것이 ‘공정한가’보다는 ‘평등한가’를 먼저 묻게 되고, 참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자격을 ‘역량’이 아니라 ‘권한’이 있고 없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내 몸속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강민 울산민예총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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