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잔의 녹차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 기사승인 : 2021-08-18 00: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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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갑자기 날이 더워졌다. 오후 1시에 길을 걷다가 참지 못하고 길가의 편의점에 들렀다. 어제보다 단지 2~3도 높아졌을 뿐인데. 단 몇 도의 온도 차이에도 숨쉬기조차 힘들어짐을 느낀다. 아마도 마스크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마스크를 더 단단히 고쳐 쓰며 차가운 녹차음료 한 병을 계산했다. 막상 음료를 샀지만, 마실 수가 없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주변을 살피고 얼른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마스크를 올린다. 찰나의 순간 푸른 잎사귀를 스치는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뒤에 더 크게 느껴지는 열기. 


짧지만 힘들었던 한낮의 외출을 마친 나에게, 마스크에 갇혀 있었던 나에게 무언가 필요하다. 늘 들이쉬는 일상의 공기가 아닌 새로운 여행지의 신선함이 절실하다. 조금 전에 마신 녹차음료가 가져온 푸른 바람과 같은. 그래, 티타임이 필요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요즘 10대~30대들의 중국에 대한 시각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티브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찻장에서 나란히 놓여 있는 세 종류의 녹차 봉지를 집어 들었다. 동글동글 건파우더(gunpowder) 형태의 자스민차, 언젠가 친구에게 선물 받은 보성의 우전(雨煎), 몇 년 전 여행에서 사 온 센차(煎茶).


첫 번째 찻잔, 꽃나무가 만발한 숲속으로. 자스민 향기가 가득한 숲속, 손끝으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산들바람. 천천히 걸어 나가면 달콤하고 시원한 꽃나무 군락지를 지나 더 깊은 숲으로. 코끝에 남아 있는 자스민 향기 뒤에 따라 오는 나뭇잎의 향기, 풀 냄새. 조금 더 시원한 바람. 짙게 드리워진 녹음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드는 빛줄기.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와 새소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꽃 향기들.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숲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두 번째 찻잔, 달빛 아래 봄의 들판에서.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그 끝에 느껴지는 곧 다가올 봄의 온기. 청보리가 자라는 낮은 언덕, 달빛이 내리는 들판. 비 온 뒤의 달콤한 풀 내음. 이름 모를 아직 피지 않은 작은 들꽃들. 손끝으로 들꽃을 톡 건드리면 아스라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지는 향기. 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별빛들이 잘그락 쏟아지는 소리. 들판에 가득한 것은 작고 여린 것들이지만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넘친다. 청보리가 물결치는 언덕에서 더할 수 없이 큰 위로를 받는다. 


세 번째 찻잔, 여름 한가운데의 숲. 녹음이 우거진 숲.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난 뒤 다시 내리쬐는 햇볕. 숨 막힐 듯 덮쳐오는 풀냄새. 숲 사이로 불어오는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상큼한 과실의 향. 짙고 짙은 숲의 향기. 강한 생명의 기운들. 태풍의 기운을 품은 바닷바람. 생명력이 넘치는 숲속에서 치유를 받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분이 든다.


차례대로 중국, 한국, 일본의 대표적인 녹차들을 마시고, 각각의 차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다. 아니 찰나지만 분명 여행을 하고 왔다. 차가 전해주는 향기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피부에 닿는 바람과 잎사귀들의 느낌마저 전해준다. 그저 상상이 아니라 맛과 향기가 가져오는 오감체험이다. 그리고 그 끝에 얻는 정서적 안정과 충만함까지. 잘 우려진 한 잔의 차는 가끔 미지의 여행지로 나를 데려간다. 오늘은 거의 동시에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세 곳을 다녀왔다. 


석 잔의 차향을 다시 떠올리자, 문득 오늘 마신 세 가지의 녹차는 모두 한 종류의 차나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세 나라의 차 문화 역시, 세 나라의 문화 전달 및 발전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출발점은 어느 한 지점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에 거쳐 전달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곳의 토양과 기후, 그 땅의 사람들과 문화가 함께 녹아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색을 뚜렷이 하게 된다. 


차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혹은 녹차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언뜻 다 같은 녹차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차들이 얼마나 그 나라의 자연이나 문화를 잘 담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차 하면 당연하게 보이차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중국에서는 녹차가 더 대중적이다. 다만 중국의 녹차는 지역마다 제다법이나 찻잎의 성격도 다르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양하고 그 종류가 많아서 때론 이게 녹차가 맞나 싶은 것들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대체로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녹차들은 진하면서도 부드럽고 일면에 화려함이 항상 어려있다. 어떻게 우려도 기본적인 녹차의 맛은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으며 차 문화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는데 여러 다인의 노력으로 다시 그 맥을 잇고 새로 꽃피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시절 처음 녹차를 접했을 때만 해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녹차라는 것은 티백으로 된 현미 녹차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세작을 주문할 수 있고 녹차 전문 브랜드 카페에서 다양한 우리 녹차를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녹차에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대표 녹차는 역시 우전(雨煎)과 세작(細雀)이라고 생각한다. 우전은 잎을 따는 시기로 구분되는 명칭이고 세작은 찻잎의 크기에 따른 명칭일 뿐 거의 같은 녹차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찻잎을 덖는 제다 방식으로 녹차를 만드는데 최근엔 다양한 방식으로 차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덖음차는 우려진 차의 색에도 알 수 있듯이 언뜻 그 특징을 바로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차들에 비해 옅은 느낌이다. 어찌 보면 가장 자연 그대로와 가깝다. 그래서 더 섬세하고 더 풍부하다. 높은 온도보다는 살짝 낮은 온도로 우려야 하며 잘못 우리면 쓰거나 아무 맛이 나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 증제법(蒸製法)으로 차를 생산한다. 일본은 녹차에서도 전통을 고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일본의 차 문화라고 하면 거품을 내서 마시는 말차를 떠올릴 것이다. 엄숙할 정도로 정제된 다도의 풍습과 함께.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센차를 더 대중적으로 마시는 편이다.


센차는 우리의 덖음차와는 달리 쪄서 만드는 차다. 찻잎 자체의 맛을 강하게 느낄 수 있고 상쾌하다. 하지만 너무 낮은 온도에서 우리면 풀 비린내가 심하고 오히려 쓴맛이 날 수 있다. 


중국의 차는 부드럽고 풍성하면서도 화려하다. 우리 차는 단아한 화려함을 잘 갈무리해 소박하고 정갈하게 드러낸다. 일본 차는 강렬하고 직선적이면서 호쾌하다. 


내가 세 나라의 녹차를 마실 때마다 대체로 느끼는 감상이다. 이는 세 나라의 다른 문화에 대한 감상과도 닮아있다. 그림, 건축, 의복, 음식, 추구하는 미의식까지. 문화라는 것은 어느 한 가지만 떼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또 바뀌고 있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국제관계까지 말이다. 더위와 마스크로 인해 시작된 찻자리 여행에서 우리나라와 이웃 국가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고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것을 배우고 대처해야 온전한 ‘나’를 지키고 서로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느끼고 배움을 얻었고 앞날을 위해 생각할 거리를 얻고 돌아왔으니 진정한 여행이었다.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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