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답사] 왜군이 울산에 남긴 임진왜란의 흔적,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

조은미 시민,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 기사승인 : 2022-04-06 00:00:12
  • -
  • +
  • 인쇄
울산향토사도서관 공동기획
울산 향토사 주제답사(7)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는데 길을 빌려 달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정유재란까지 약 7년 동안 이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보급로 확보와 전쟁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본토와 가까운 우리나라 동남해안에 28개의 왜성을 짓도록 명했다. 그중 두 곳이 바로 울산에 있는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이다. 두 왜성의 비밀과 특징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답사회원들과 발표를 분담하지 않고 문화관광해설사의 전문적인 해설을 요청했다.

서생포왜성
 

▲ 서생포왜성의 내성 주출입구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 제2군 사령관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하에 축성된 것으로, 국내에 있는 왜성 중 규모가 크고,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연구 가치가 높다고 한다.전쟁 후 왜군이 물러나고,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도 활용됐다.


해설사의 집 바로 아래쪽에 있는 우물터를 보았다. 이 우물은 왜성이 지어진 무렵부터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 성곽을 지을 때, 우물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본격적인 왜성 답사를 위해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바다 쪽 평지에서 산성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을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 하는데 방벽(防壁)의 일종이다. 이 위에 가설 건물인 ‘야구라(櫓)’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창고와 무기고 역할을 한다. 야구라와 정상의 천수각까지 합하면 성벽 위에 건물이 총 20동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서생포왜성 본환의 천수각이 있었던 자리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오르막 옆의 경사면을 보니, 많은 소나무가 베여나가 듬성듬성한 모습이다. 덕분에 성곽의 형태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시야가 확보되는 장점이 있지만, 당장은 미관상 좋지 못하고 남아 있는 나무들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왜성의 구조와 이름이 적혀 있는 표지판을 살펴보며,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구분되는 일본식 성곽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밖으로 고랑을 파서 적의 접근을 막는 호(해자)는 개운포성의 마른 해자와 비슷했지만 더 깊어 보였다.


‘내성 주출입구’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왜성의 특징이 나타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성벽은 지면에서 90도로 수직으로 쌓는 데 비해, 성벽의 기울기가 60도로 지면에 가까워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이다. 태풍과 지진이 잦은 일본의 환경적인 특성상 일찍부터 내진에 강한 축성술을 고안한 듯하다.


네모난 되(곡식의 부피를 잴 때 사용하는 도구)처럼 생겼다고 하는 ‘되형출입구’는 적을 헷갈리게 할 목적으로 설계됐는데 진입로의 방향을 꺾어 적이 성의 내부를 볼 수 없고, 사방에서 적을 향한 공격이 가능해 우리의 ‘옹성’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가파른 오르막을 숨차게 걸어 올라 드디어 왜성의 맨 꼭대기인 본환에 다다르니 사방의 시야가 확 트인다. 정면으로는 진하 바다가 넓게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회야강의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모습이다. 400년 전, 이 조용하고 푸른 진하 바다와 회야강으로 새까만 왜선 수백 척이 들어오고, 이 지역에 살던 선량한 선조들이 성을 쌓기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돼 피땀 흘리는 모습, 성안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 왜병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상상하니 무섭기도 하고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상에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서생포왜성의 본환에서 바라본 진하 바다와 회야강 일대의 전망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본환의 왼쪽 아래로는 석성에 토성이 더해진 나팔등이 이어져 있다. 본환의 중심 성벽으로 걸어가 일본의 성(城)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목조건축물 ‘천수각’이 있던 자리로 올라갔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조선의 승려 사명대사가 세 차례에 걸친 강화협상을 했던 자리다. 위태로운 조선의 운명을 두고 과연 어떤 대화들이 오고 갔을까 상상해 본다.

 

4월이 되기 일주일 전인데 벌써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며칠 안에 아름답게 만개할 듯하다. 본환 곳곳을 둘러보고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성 초입에 자리한 ‘창표당(蒼表堂)’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왜군에 맞서 싸운 조명연합군과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름이 적힌 위패들을 보며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희생한 선조들을 위해 잠시 묵념했다.

 

▲ 서생포왜성의 창표당에 모셔진 위패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동문 쪽으로 내려와 마귀제독의 사당과, 근처 암벽에 새긴 명문 ‘편장군승첩동(片將軍勝捷洞)’을 확인한다. 명나라 장수 ‘마귀’제독과 그의 부장(部將) ‘편갈송’은 정유재란 때 왜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일반주택가 안에 있는 남문으로 갔다. 답사회원과 사전에 조사할 때, 남문 쪽에 조선시대 위정자들의 공덕비 또는 선정비 5기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실제로는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울산왜성

‘학성공원’이라 불리는 울산왜성은 약 100년 전에 울산지역 유지(有志)였던 김홍조가 땅을 기증해 최초의 도심공원으로 조성돼 문을 열었다. 낮은 언덕에 동백나무와 벚나무, 소나무 등이어우러져 현재까지도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 성을 쌓고 주둔해 있던 왜군과, 왜성을 함락하려는 조명연합군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도산성전투’로 인해, 일본인에게는 서생포왜성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당시 치열했던 전투로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돼 오랜 시간 성에 고립된 왜군들은 식량과 마실 물이 고갈돼 흙벽을 끓여 먹거나 말의 피를 받아 마시고 급기야는 소변까지 마셔가며 버텼다고 한다. 그 처절했던 경험을 잊지 않았던 가토 기요마사는 본국으로 돌아가 구마모토 성을 쌓을 때 우물을 100개 이상 파고, 비상시 식량으로 쓸 수 있도록 다다미(일본식 돗자리)를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 울산왜성 본환 중심의 자연석 ‘마피장’

왜성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공원의 조경에 시선을 빼앗겨 원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삼지환의 한 편에 왜성의 모형을 본뜬 조형물이 있어 성곽의 전체적인 구조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 울산왜성 본환의 동백. 나무에서 떨어져 바닥에 다시 피어난 동백꽃 ©조은미 시민기자

이지환을 거쳐 본환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고 계단이 있어 서생포왜성보다 오르기가 훨씬 수월하다. 본환에 다다르니 커다란 동백나무에서 떨어진 새빨간 동백꽃이 땅바닥을 수놓고 있다. 동백꽃은 땅에서 다시 핀다고 하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도 추하지가 않다. 이 곳 본환에는 천수각은 짓지 않았다 하고, 한가운데 작은 연못처럼 자연석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태화강과 건너편 삼산의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동해 동쪽 가장자리로 가니 멀리 무룡산과 울산만, 반구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이 일대는 ‘반구동 유적’으로 목책 등 대규모의 항만시설이 발견돼 학계에서는 신라해상 무역의 거점이었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현재는 고층아파트와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상상하기 어렵다.

 

▲ 울산왜성 본환의 동쪽. 무룡산과 울산만, 반구동 일대 전망 ©변상복 울산향토사답사회 회장

사방의 전망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가면서 본환의 남쪽에서 물가의 선착장(선입지)까지 이어진 경사진 성벽 ‘노보리이시가키’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유사시 본환에서 선착장까지 이르는 안전한 통행로가 됐다고 한다.


왜성의 건너편에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고려시대 토성이 남아있다. 전쟁 당시 조명연합군의 진지(陣地)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전쟁이 끝나고 왜란 때 활약한 장수와 희생된 의병들의 공을 높이 산 선조 임금은 이들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하고, 방어의 요지로 환란을 겪은 울산군과 언양현을 합쳐 ‘울산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두 ‘왜성’의 존재 의미와 보존에 대해서
 

▲ 울산왜성 삼지환에 있는 왜성의 모형 ©조은미 시민기자

울산왜성은 도심 속에 있어 훼손과 변형은 있지만, 공원으로 활용돼 시민들에게 친숙했고, 서생포왜성은 도심과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그 일대의 늦은 개발로 인해 방치되다시피 해서 오히려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사례다. 누군가는 우리 민족을 고통받게 한 일본인의 성곽을 문화재로 보호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어두운 역사의 증거이고, 아직까지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찾지 않거나 아예 무관심하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 어떤 역사에도 흥망성쇠는 있다. 어두운 역사일수록 더 관심을 가져야 하고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크기 때문이다.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는 것을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 하는데 최근 증가하고 있는 여행 형태다. 그만큼 아픔을 마주하는 의식 수준도 발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듯 울산의 두 왜성은 관광자원으로서도 중요하고,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후대에도 이어져야 할 역사의 증거물이기에 그 특징과 의미를 깊이 되새기고 보존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울산왜성의 경사형 성벽인 노보리이시가키 ©조은미 시민기자

조은미 시민기자,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조은미 시민,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조은미 시민, 울산향토사답사회 사무국장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