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읽고

이선주 / 기사승인 : 2021-12-20 00:00:54
  • -
  • +
  • 인쇄
서평

 

몇 해 전 광복절날 초등 저학년 아이 둘을 데리고 울산문화회관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광복절이라고 미니 태극기도 나눠 주고 광복절 행사도 했다. 특별 행사로 짧게 뮤지컬의 중요한 대목을 선보였는데 그 뮤지컬이 바로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이었다. 


그 뮤지컬은 나에게 ‘박상진’ 의사를 처음으로 강하게 각인시켰고 또 나를 부끄럽게도 만들었다. 왜냐하면 울산에 산 지 45년이 됐지만 박상진 의사의 이름조차 내게는 아주 생소했기 때문이다. 중부도서관을 다닐 때도 도서관 앞 박상진 의사의 동상을 무심히 지나가기만 했고, 박상진호수공원이나 박상진 의사의 생가, 고헌초등학교의 이름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박상진을 접한 건 그 짧은 한 편의 뮤지컬이었지만 책을 통해서 박상진을 제대로 알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박상진은 부유한 만석지기 재산을 가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인정이 많고 똑똑한 아이였다. 가난한 친구와 자기의 새 옷을 바꿔입는가 하면, 서자제도와 노비제도의 철폐를 주장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판사직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독립투사들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법관은 될수 없다며 판사직을 내려놓았다. 또, 누구에게나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광복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허위 왕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김좌진,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상덕태상회를 만들어 일본의 눈총을 피해 독립투쟁을 계획하기도 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또, 신흥강습소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했고, 만주 이민 사업을 하려고 ‘경천어동지회’를 만들어 우주 만물에 높임말을 붙이기도 했다. 사람은 꿈으로 사는 것이라며 염치가 없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고도 했다. 


박상진은 1915년 8월 25일 광복회를 결성해 3년 6개월 동안 광복회를 이끌었다. 악함이 이기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며 ‘광복’을 꿈꿨지만 안타깝게도 1921년 8월 11일에 돌아가셨다. 감옥에서 순국할 때도 남자로 태어나 이룬 일 하나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올해로 순국 100주년을 맞은 박상진! 만약 나라면 모든 것이 보장되는 삶을 포기하고 박상진 의사처럼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의 업적에 비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너무나 미약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박상진 의사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남은 가족들이 받은 정신적, 물질적 고통도 엄청나다고 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씁쓸하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이지만 또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역사! 해방된 조국이 박상진 의사와 광복회의 소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독립운동가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도 한 번씩 친일파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거론된다.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그 당시에도 우리 민족을 팔아서 잘 먹고 잘살았고, 지금도 자기의 이익과 후생만 챙기고 있으며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기의 권리를 말한다. 일부는 정치계의 높은 자리에까지 있다고 들으니 가슴 한곳이 멍든 것처럼 아려온다. 


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는가?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고 바로 알아야겠다. 전국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울산의 자랑 박상진 의사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관심을 갖고 또 널리 알려야겠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우리를 바로 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알고 바로 잡을 때다. 역사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이선주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