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찬반 논란 속에서 심산 김창숙을 만났던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0-14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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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1)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악의적인 오보(1945.12.27) 이후 해방정국은 찬반 논란으로 크게 달아올랐다. 그 과정에 반대 입장으로 제일 앞장선 것은 국내로 귀환한 임시정부였다. 김구를 비롯해 임시정부 참가자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인민위원회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계열의 탄탄한 기반과 미군정을 등에 업고 친일파들의 지원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 등 우익정당의 양대 진영을 깰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신탁통치 반대의 여러 갈래…김구, 이승만, 송진우

동아일보 보도가 나온 다음 날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리고 12월 29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명의로 ‘신탁통치 절대 반대 전문’과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행동강령 9조를 발표했다. 그 내용 속에 ‘외국 군정 철폐’와 ‘임정의 절대 수호’도 포함된다. 그리고 12월 31일 반탁 시위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인민당과 공산당 등 좌익계열은 사실상 배제시켰다. 30일 선임된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76명 중에 형식적으로 박헌영의 이름은 올라가 있었으나 여운형을 비롯한 인민당 인사들은 빠져 있었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촉과 송진우가 이끈 한민당도 초기부터 반탁 입장을 밝힌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셈법이 조금씩 달랐다.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반탁 세력을 주도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미군정의 입장과 일치했다. 


일단 미군정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바라는 입장으로 본국 정부(미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군정 철폐를 걸면서 미군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넘어 협박성 경고를 했다. 


이는 한민당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를 앞장세워 반탁으로 정국을 몰아넣는 데 앞장섰지만 미군정 반대로 이어지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한민당 당수 송진우는 미군정 하지의 부탁을 받은 상태에서 12월 29일 김구와 직접 회동하게 된다.
 

▲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 반대 집회에 뿌려진 전단

 


한민당 송진우 암살…미군정은 배후로 김구 지목

김구와 임시정부는 한민당과 연계해 미군정청 직원들의 호응을 받고 향후 미군정으로부터 아예 정권을 인수하고자 했다. 한민당이 미군정청 직원 특히 경찰 간부들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임시정부는 반탁운동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영향이 미치는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대체할 조직 구성까지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계획은 임시정부 포고문(국자 제1호) 첫머리에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 및 한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이란 문구를 넣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12월 29일 김구와 송진우의 회동은 그 밑그림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송진우는 미군정의 입장과 함께 신중한 반탁운동이라는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즉각적인 권력 접수를 바라는 김구와 달리 송진우는 최소 2년 이상은 미군정이 유지돼야 좌익을 누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경교장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12월 30일 새벽에 본인의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아침 6시경 한현우(당시 34세)를 비롯한 5~6명의 피습과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계획적인 암살이었다. 


미군정을 비롯한 다수가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직접 지시가 아니더라도 암살범들이 김구의 추종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하지는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불러 강하게 질타했다. 이는 바로 전날 임시정부가 미군정청 소속 경찰들을 모두 자신들의 지휘 아래로 두겠다고 선포한 것, 신탁통치 반대 총파업을 시도한 것과 묶어 강경 대응한 것이었다.
 

▲ 1945년 12월 31일 <동아일보> 송진우 암살 기사 ‘자택에서 흉탄을 밧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지지로 선회한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2일 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라는 밝힌다. 동아일보의 오보로 불거진 초기 신탁통치 반대라는 입장을 밝혔던 것을 거둬들인 것이다.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였고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반신탁운동’에 대한 성토였다.


조선공산당의 입장 변화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첫 방북 과정에서 이뤄졌다. 박헌영은 평양에서 소련군정을 만나 모스크바 회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소련의 입장을 확인한 후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신탁통치 찬반이 아니라 민족통일정부라면서 쟁점의 전환을 꾀했다. 이런 입장 변화는 여운형을 비롯한 인민당도 마찬가지였다. 1월 3일에는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연 대회에서 대중적으로 처음 ‘신탁통치 반대’ 대신 ‘삼상회의 결정 지지’라는 구호가 울렸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입장 변화를 둘러싸고 동아일보는 또 한 번 왜곡보도를 낸다. 평양을 다녀온 박헌영이 1월 5일 내외신 기자들을 만나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소비엔트 연방 가입’을 희망했다는 외신기자 보도를 인용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오보였고, 당시 기자회견에 참여한 기자단 역시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입장문을 성명서로 발표했다. 하지만 박헌영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입장을 바꾸고 민족을 배신한다는 선동 공세가 전방위로 시작됐다. 그렇게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둘러싼 신탁통치 논란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입지를 흔들려는 각종 시도는 계속됐으며, 그 악영향은 무척 컸다.
 

▲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주최 집회, 가운데 연설하는 김구


이관술, 신탁통치 찬반 문제로 심산 김창숙과 만나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해방정국은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게 된다. 이른바 ‘찬탁’과 ‘반탁’이라는 전선이 그어져 버린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원로 김창숙(1879~1962)은 깊이 탄식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임원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 1946년 1월 3일 <중앙일보> ‘반탁보다 먼저 전선통일’ 조선공산당 입장 표명

김창숙은 경북 성주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9년 만세운동 초기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세력을 모아 1차 세계대전 종전회의가 열린 파리에 장문의 편지를 보낸 ‘1차 유림단 사건’을 주도했다.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다시 돌아와 일어난 ‘2차 유림단 사건’도 김창숙의 계획이었다.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겪고 수감됐다 풀려난 뒤에도 비타협적인 항일투쟁을 펼친 유림의 거목이었다. 


이관술과 이승엽이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김창숙을 방문한 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관술이 나선 것은 김창숙과 여러 관계가 있었기에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김창숙은 유림 중 근대개혁파에 속하는 한주학파였는데 이관술의 고향 입암마을의 집안 어른인 가산 이우락과 동도였다. 그리고 같은 연결고리로 경주에서 입암마을로 이주해온 손후익은 김창숙과 사돈을 맺었다. 또 김창숙이 2차 유림단 사건 때 언양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자 피신했던 곳이 입암마을이고, 며느리가 되는 손응교는 어린 시절부터 이관술에 대해 좋은 영향을 받은 은인으로 여겼다. 


김창숙은 자서전에 그때의 만남을 상세히 적어 뒀다. 이관술과 이승엽에게 김창숙은 “탁치를 환영한다는 것은 나라를 파는 매국”이라고 질타했다. 이에 이관술은 “정세를 보면 탁치는 불가피하며, 정세를 알지 못하고 공연히 반대만 외치는 것은 국가에 해로운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창숙은 “(공산당) 최고 간부 몇 사람이 소련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태도를 돌변해서 찬탁하게 된 것이니 통곡할 노릇이다”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이에 이관술은 “미국이 바로 이리지요. 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결국 이때의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난 마지막 인연이 됐다. 

 

▲ 사진 가운데, 심산 김창숙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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