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발치는 이관술 누명 탄원, ‘정판사 사건’ 첫 공판은 졸속에 아수라장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2-22 00: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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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 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6)

이관술이 체포돼 구속되고 재판을 받기까지 항일 혁명투사로 살아왔던 삶을 역설하고, 누명을 썼다는 해명 지지 글들이 터져 나왔다. <현대일보>는 7월 10일에 발행한 신문에 ‘조국해방에 바친 그의 투쟁반생’이란 장문의 글을 실어 이관술의 억울함을 조명했다. 더불어 이관술의 동덕여보 교사시절 제자인 박진홍의 투고 글을 내서 거짓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에 대해 질타했다. 

 

▲ 1946년 7월 10일, <현대일보> 공당간부 이관술시 피체 ‘조국해방에 바친 그의 투쟁반생’

이관술의 여동생 이순금도 7월 15일 <현대일보>를 통해 투고 글을 썼다.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라는 제목으로 신문의 반면을 채울 정도로 긴 글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관술이 철저한 항일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본인이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검거 상황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8.15 이후. 오빠의 활동을 나는 아니 쓰려 한다. 그것은 조선 인민이 나보다 더 잘 아는 까닭이다. 다만 내가 힘 있게 주장하는 것은 8.15 이후에 있어서도 진정한 애국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불면불휴 그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애국자를 민중으로부터 뺏어 감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추악한 죄명까지 씌워 잡아간다 함이야 꿈엔들 상상할 일인가! 나는 주장한다. 위대한 애국자 이관술 동지를 즉시 석방하라고!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 진정한 애국자인 우리 오빠의 몸에 아무도 결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 1946년 7월 15일, <현대일보> 이관술 여동생 이순금의 투고 글 중 마지막 부분

아수라장이 된 ‘정판사’ 첫 공판…경찰 발포로 방청객 사망

이관술을 제외한 9명의 피의자와 뚝섬 위폐사건 관계자 4명에 대한 첫 공판은 서울 재판소 4호 법정에서 열렸다. 양원일 판사가 주심판사였고 김정열과 최영환이 부심이었다. 검사는 조재천과 김흥겸 두 명이며 변호인단은 모두 9명으로 꾸려졌는데 그중 7명이 참석했다. 


공판이 열릴 4호 법정은 150명을 수용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법원은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에 126매의 방청권을 사전에 배포했다고 한다. 단체들 대부분이 우익 단체여서 형평성에 시비가 생겼다. 


정판사 사건이 언론을 통해 무차별로 쏟아지면서 대중의 관심은 무척 높았고 일부 시민들은 방청을 위해 전날 밤부터 법원 주위에서 노숙을 하며 기다렸다. 새벽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법원 출입구는 시작 전부터 완전히 막혀 버렸다. 그런 상황에 법원은 무장경관 60명을 배치했다가 수백 명을 추가했다. 그러나 5000명이나 되는 방청객들을 모두 통제하기는 힘들었다. 


피고들이 법원에 도착할 때 이미 불어난 군중들로 법원 주변은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황을 두고 경찰은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구속된 이들을 구출하려는 시도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방청객 5000명과 경찰 60명이라는 압도적인 차이에도 그런 시도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오전 9시 30분, 재판정으로 피고들이 입장하자 방청권을 받지 못한 이들이 구호를 다시 외치며 항의가 거세졌다. “모략 공판을 분쇄하라.” “인민재판을 하라.” 이렇게 함성이 커질 무렵 소총이 발사되는 큰 소음이 들렸다. 경찰이 소총을 들고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 1946년 7월 30일, <자유신문> ‘무장경찰이 발포 검속’ ‘총탄으로 빈사의 중상’

총탄에 맞아 경동중학교 3학년 학생 전해련이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방청객들이 몰려 경찰이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소총 위협사격을 하며 여러 발을 발포할 때 피격된 것이었다. 탄환은 학생의 얼굴에 맞았다. 주위에 있던 여러 명의 청년이 쓰러진 학생을 업고 병원에 수송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장경찰은 이들을 막아서고 자신들이 조치하겠다며 학생을 내어놓으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청년들은 대치 과정에서 주변을 지나던 차량에 다친 학생을 태워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기마경관이 따라와 총을 겨누며 제지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병원에 도착해 겨우 수술대에 올랐을 때는 1시간 반이 지난 시각이었다. 때를 놓쳐 수술도 못 하고 후송해 온 청년들이 피를 수혈하면서 겨우 빈사상태를 유지했다. 쓰고 있는 모자를 통해 소속 학교를 확인했고, 주변에 수소문해 연락받은 부모가 도착했지만 그날 오후 2시 반경 절명했다.

첫 공판은 무기 연기, 법정과 장례식에서 체포한 이들 군법재판은 속행

그렇게 재판은 시작부터 총성과 비명, 기마경찰에 말발굽 소리까지 더해지면서 법원 안팎이 온통 아수라장으로 돌변해 정지된다. 이 상황은 낮 12시 이후까지 계속됐다. 그 와중에 방청객 50여 명이 경찰에 체포당해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취재하던 기자도 맞고, 촬영기사도 체포돼 이른바 ‘위폐공판 소요사건’으로 확대됐다. 


법정은 12시 30분이 돼서야 수습됐다. 첫 공판은 열렸지만 처음부터 변호인들의 질타가 빗발쳤다. 쇠고랑을 차고 무장경찰이 호위하면서 입장했는데 일제강점기에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더구나 재판에 송국된 지 불과 열흘 만에 재판이 열려 제대로 된 변론이 불가능한 것도 문제였다. 


변호인단은 정상적인 변론 준비를 위해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다. 그동안 경찰 수사가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기소 이전까지 변호사들은 사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기소 다음날 바로 촉박하게 공판기일을 정한 것이 문제였다. 


피고들 역시 박락종을 대표로 ‘피고자 공동 회의’를 열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근거로 일제강점기 법정에서 같은 사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거부했다. 변호인단은 즉각 재판장 기피 신청을 했다. 결국 재판은 개정 15분 만에 무기한 연기를 결정했다. 


7월 29일 첫 재판 당일 체포된 50명의 방청객에 대한 재판이 8월 5일부터 빠르게 열렸다. 죄명은 미군정의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고발로 미군정 군정법정에 회부됐는데 채 한 달을 넘기지 않은 8월 20일 최종 공판이 열렸다. 무죄 1명을 제외한 나머지 49명은 최고 5년에서 최저 3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피고들은 모두 구경 갔다가 체포당했으며, 해산명령 때 어물어물하다 경관이 폭행했다고 증언했다. ‘불온한 폭언으로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체포 사유는 경찰관의 모략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정은 철저하게 경찰의 입장에서 판결했다. 


경찰 발포로 얼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경동중학생 전해련의 장례식은 8월 4일 오전 10시부터 서대문고 동명고등여학교에서 열렸다. 비가 오는 날씨였지만 1만 명의 추도객이 모일 만큼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다. 미군정 장관 러취가 사망사건을 그저 유감이라고 표현해 공분이 더 커졌다. 운구 행렬이 미아리 공동묘지로 향할 때 무장경찰과 다시 충돌했다. 경찰은 본인들의 과잉 진압으로 어린 학생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반성보다, 민심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해 또 한 번 강경하게 진압했다. 이날 경찰에 항의하다 체포된 이들의 숫자는 20여 명이었고 이 중 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인단은 재판장 양원일에 대해 기피신청을 냈다. 재판장 양원일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 중 하나다. 1912년에 태어난 그의 본명은 양판수로 창씨개명 때 야나가와 겐이치로 바꿨다가 해방 후 다시 개명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양원일이 외골수였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가 신간회 활동으로 체포됐다 면소된 일로 법원 경력에 손해를 봤다는 열패감도 있었다고 한다. 

 

▲ 1946년 8월 7일, <조선일보> ‘피고 구경 갔다가 피검, 원고 폭언하니 체포’, 친일부역자 양원일은 ‘반공’판사로 돌변, 변호인단은 재판장 기피 신청

양원일에게 ‘정판사 사건’은 절호의 기회였다. 미군정 기간 열린 재판 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재판에 주심으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 내내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후 반탁재판이나 제주 4.3항쟁에 파견된 책임판사 등 우익계열 판사로 촉망받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랬던 그가 38살 나이로 세상을 뜨는 과정도 기묘하다. 1949년 3월에 다른 이도 아닌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던 양원일은 지인들과 대법원 관사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술을 마신 뒤 9시 반 경 회현동 국방본부 앞을 지나다 불심검문에 걸렸다. 보초를 서던 일등상사 이응주가 검문을 시도하니 폭언과 함께 총을 빼앗으려 했다. 심지어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꺼내려 하자 이 상사가 정당방위로 소총을 발사한 것이다. 취기에 달아오른 만용이 출셋길 대신 저승길을 열어버렸다. 

 

▲ 1946년 8월 21일 <현대일보> ‘법조계 원로 허헌 씨 몸소 특별변론을 신청’
변호인단 9명은 조평재, 윤학기, 강증인, 김용암, 한영욱, 이경용, 강혁선, 오승근, 백석황이었다. 그중 조평재, 강증인, 오승근 3명은 재판장 양원일과 고등시험 동기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그들 역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있다. 양원일은 이들과 시험합격은 동기였지만 사법관시보 임용이 늦었기에 법조경력에서는 밀렸다. 해방 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정판사 사건 법정에서 대척점에 섰다. 

 

▲ 1946년 7월 31일, <현대일보> ‘편파된 재판 내릴 조건 지적’ 변호인단 성명

재판이 연기된 뒤 변호인단은 편파적인 재판으로 결론 날 수 있다는 지적을 하며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이 낸 기피신청은 항고까지 모두 각하됐다. 그렇게 양원일을 주심재판으로 두 번째 공판이 열렸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사상범 사건의 변호를 자주 맡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허헌이 특별변호인으로 참가를 신청해 허가를 받기도 했다. 

 

▲ 1949년 3월 5일, <자유신문> ‘고심 양원일 판사 3일 밤 국군 총탄에 절명’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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