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 -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2)

최미선 시민인문학교 교장 / 기사승인 : 2021-07-07 0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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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숲 시즌2-방황


오렌지 행상, 수치심을 느끼다

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시민인문학교 교장=질문 중에 에릭의 부모가 에릭에게 삶의 소소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녀들에게 어떠한 삶의 소소한 기술을 가르치나요? 무엇이 삶의 소소한 기술인가요?


이은민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인문강사=아버지가 마흔 살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마르타도 전쟁 후에 독일로 돌아가 에릭은 혈혈단신이 됩니다. 가구 제조공 조합원들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300달러를 에릭에게 전달해요. 전재산인 거죠. 에릭은 노숙할 수 있는, 날씨가 온화하고 길가에 오렌지가 열려 있는 곳, 로스앤젤레스로 떠납니다. 


그는 세상에서 혼자 몸이었지만 두려운 것이 없었어요. 생계비를 버는 방법 따위는 전혀 몰랐고 300달러가 다 떨어지고 난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걱정조차 하지 않았어요. 싸구려 방을 빌리고 오로지 독서에 전념합니다. 돈이 별로 안 드는 생활이었지만 돈은 바닥나고 가죽 재킷을 처분하며 지내다 굶주림이 찾아옵니다. 굶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이 대목이 가슴 아팠어요. 부모 된 심정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유의미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홀로 남은 에릭의 처지가 가슴 아팠어요. 부모의 보살핌이 없을 때를 대비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삶의 기술들이 필요해 보였어요. 식사 준비, 청소, 빨래, 생계비를 버는 방법 등과 미래를 대비해 현재를 준비하는 기술들 말입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부모의 간섭과 지도가 없었기에 무채색의 마음으로 세상을 편견 없이 오로지 관찰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최미선=성실한 노동자로서의 모습에는 만족한 듯 보이지만 유능한 상인으로서는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를 팔기 위해 말을 꾸며내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인 듯합니다. 그의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은민=에릭 호퍼는 길 위에서 여러 인물과 사건을 만났어요. 그 이야기 속에 그의 생각과 성품이 담겨있습니다. 에릭이 다양한 군상과 만들어내는 소박한 삶의 스토리들은 그만의 사상과 신념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에릭은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오렌지 행상을 시도합니다. 그는 오렌지 양동이를 들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채소 상자를 비우고 깨끗한 종이를 상자 안에 깐 다음 단단한 것은 밑에 넣고 익은 것은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위에 채워 넣었어요. 이런 세심한 행동은 동네에 금방 소문이 나 그는 오렌지를 예술 작품처럼 채워준 혀 굳은 행상으로 알려졌고 오렌지 주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굳어 있던 혀도 풀려 부인들에게 엉뚱한 너스레를 떠는 그에게 사람들은 거부감을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깊은 회의와 수치심을 느끼게 되죠. 물건을 팔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장사는 타락의 근원임을 깨닫고 그곳을 떠납니다. 에릭은 진실되고 진심 어린 행동에 가치를 두는 사람입니다. 융통성은 부족해 보여도 그런 삶의 태도가 많은 사람에게 호감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헬렌과의 사랑에서도 그런 면이 보입니다.

헬렌과 결혼했다면 에릭 호퍼는 행복했을까

최미선=헬렌과의 이별은 가슴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헬렌과 결혼해서 정착했다면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결혼해서 정착하는 것을 안정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은민=에릭 호퍼는 처음 만난 헬렌과 프레드를 식당으로 안내하고 방을 빌리는 것을 도와주면서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의 독특한 행동과 진심 어린 말은 의심에서 감동으로 이어지고 에릭과 헬렌은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충동적이고 인정 많은 헬렌은 에릭에게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물리학 분야에 대단한 재능이 있으니 떠돌지 말고 버클리에서 일 년 동안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 그녀의 제안에 에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들의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 분야의 사람들은 곧 나를 협잡꾼으로 여길 것이다. 그녀들과 함께 살면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버클리를 떠났다.” 


에릭은 레몬 잎 백화현상을 해결해 스틸턴 박사의 믿음을 한 몸에 받게 됐어요.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될 수도 있었고 헬렌과의 미래를 꿈꿔볼 수도 있었어요. 그녀와의 이별로 몇 년 동안 고통스러울 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에릭은 이 모두를 거절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에릭은 행복의 아포리즘으로 “우리가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고 했습니다. 안정된 행복을 얻기 위해 결혼해야 하고 정착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한 변명이 아닐까요? 행복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미선=돈에 대한 호퍼의 입장은 지극히 미국 자본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자본은 약자들이 고안해낸 작품으로 인류의 진보에 기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자본으로 흡수해버리는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조금은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은민=모든 철학자가 ‘시대의 아들’이고 사상은 시대 상황을 반영합니다. 에릭은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악의 본질도, 인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고 했어요. 이는 돈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켰어요. 


돈이 없는 사회에서는 무자비한 힘이 분산될 수도 없고 선택의 자유와 평등도 없어 절대 권력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절대 권력은 돈을 증오해왔고 사람들을 자신의 이상에 따라 지배하고자 공포로 권력을 이용하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돈이 지배적인 역할을 멈추는 순간에 자동적인 진보는 그 종말을 맞이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절대적인 신의 자리를 자본이 잠식해 그 병폐가 극에 달하고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됐지요. 금융자본이 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합니다. 4차 혁명과 소득 불균형의 심화로 위기를 맞고 있는 시대에 기회는 평등하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돈이 없는 사회로 갈 수는 없어요. 또 한 번 돈의 쓰임에 혁신이 필요합니다. 소득의 재분배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어요.

수용소에서

최미선=수용소에 모인 사람들은 장애가 많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에릭의 철학과 삶의 스토리에 관심을 보이고 신기해하며 싸움의 중재나 인생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수용소에서의 짧은 기간은 에릭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했을까요?


이은민=에릭 호퍼는 엘센트로의 임시수용소에서 4주일을 보내요. 그곳은 일자리가 없는 떠돌이 노동자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곳이었어요. 수용돼 있는 인원 200명 중 70명만이 겉보기에 멀쩡하고 나머지는 손상되고 찌든 얼굴과 외모를 지녔어요. 적응 불능자들은 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떠돌이였는데 수용소에 모인 그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았어요. 


에릭 호퍼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사색한 삶의 철학을 전달할 때 스토리텔링 입담꾼의 면모를 보입니다. 인문학 교실이 따로 없었죠. 수용소 사람들은 에릭의 철학과 삶의 스토리에 관심을 보이고 신기해하며 싸움의 중재나 인생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 몽테뉴는 뭐라고 말했나요”라고 물었죠. ‘희망의 인문학’에 참여한 노숙자가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었다는 대목이 떠오릅니다. 에릭은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됐고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라고 했어요. 질문할 충동이 없는 사회는 정체되기 마련이라고 했어요.


에릭은 수용소를 떠날 때 내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느낍니다. 적응 불능자가 인간 사회에서 맡는 특이한 역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뒤 머릿속에 숨어 있던 문장으로 그것을 끌어낼 때 자신이 행복하고 인생이 아름답게 느꼈어요. 


그곳의 경험은 에릭의 모든 사고를 물들이고 50년 동안 쓰게 될 글의 씨앗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쿤제

최미선=쿤제와 나눈 미래의 이야기가 이 책의 백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대화를 읽어보면, 신체를 사물에 직접 사용해서 상태를 변화시키는 노동자의 삶이라는 것에 경이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자 에릭보다는 농장주 쿤제를 꿈꿉니다. 선생님은 어떤가요? 에릭을 꿈꾸나요 아니면 쿤제를 꿈꾸나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은민=쿤제의 삶을 살아 온 내가 에릭의 삶을 희망합니다. 농장주 쿤제는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문명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안전을 찾아 농부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미래에 대해 병적인 두려움을 지니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에릭을 훈계합니다. 그렇지만 길 위의 삶에서 만난 여러 인물 중 에릭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쿤제는 성숙하고 현명하게 변화해 많은 이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유언을 남깁니다. 음악을 비롯한 각 예술 분야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육성하기 위해 50만 달러를 기증합니다. 그는 노년의 여생이 쇠락과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지 않고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고 했어요. 또한 떠돌이들의 합숙소 ‘정글’을 세울 수 있도록 4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최미선=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은 구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이은민=에릭의 삶은 그 자체가 감동입니다. 그의 생각의 집약체인 아포리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삶의 다짐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교육입니다. 에릭은 교육의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고 했어요.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죠.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입니다. 계속 배워 나가겠습니다.


최미선=<길 위의 철학자>는 선생님에게는 어떤 책이었나요?


이은민=에릭 호퍼의 자유로운 삶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가까이에 죽음이 있다면 삶에 더 몰두할 수 있다.’ ‘이른 죽음은 형벌이 아니고 오랜 삶은 축복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어요. 마흔 살밖에 살지 못한다는 예언과 언제 다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치 있는 삶과 두려움 없는 인생을 살게 했어요. 사유보다 경험, 사색보다는 소유라는 시대는 소비의 척도로 인간 존재감을 결정짓고 있어요. 그로 인해 인간은 세상 밖으로 소외되죠. 우리는 종종 불행한 환경을 부모 탓, 세상 탓, 운명 탓으로 돌립니다. 에릭 호퍼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가 없어요. 에릭 호퍼는 여행자처럼, 관찰자처럼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갔어요.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고 그런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용기를 줍니다.


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시민인문학교 교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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