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혁명운동가로 성큼…반제국주의동맹에서 경성트로이카까지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5-05 0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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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4)

동덕여고보에 몰아친 검거 열풍, RS협의회

한여름 태풍처럼 몰아치듯 동덕여고보 동맹휴업이 끝났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학내 분규라고 방관하지 않았다. 잇단 동맹휴업의 배후를 찾겠다고 혈안이 돼 수사를 펼쳤다. 무엇보다 각 학교에서 휴업을 주도한 학생들에게 끄나풀을 붙여 감시했다. 그 결과는 ‘경성RS협의회’ 검거 사건으로 이어진다. 


경성RS협의회에 대한 첫 검거는 1932년 초에 시작됐다. 일제 경찰은 학생이 참가한 독서회와 사회과학연구회에 ‘RS(Reading Society)’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밑바탕이 중국무관학교 출신 이평산을 중심으로 한 학생비밀결사 조직이라고 결론지었다. 


일제 경찰는 1931년 2월부터 사회주의 계열 학생조직 RS협의회가 1년 동안 경성 내 학생운동과 동맹휴업을 이끌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경성 안의 중등학교 학생 40여 명을 검거해 취조했고. 최종 18명이 검찰 기소로 재판에 넘겨졌다. 


동덕여고보에서는 이효정, 박진홍, 이순금, 이종희가 연행됐다. 그중 박진홍은 1932년 2월 구속이 결정됐다. 박진홍은 동맹휴업으로 퇴학이 결정된 후, 학교를 떠나 대창고무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독서회 조직을 이끌었다는 죄명이었다. 박진홍 외 연행자들은 1932년 졸업식을 앞두고 모두 기소중지로 석방됐다. 


학생들이 검거되는 사건을 보면서 이관술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중에는 여동생 이순금도 포함돼 있었으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식을 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과 작별의 시간 역시 남달랐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항일운동과 혁명운동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관계가 바뀌게 됐다.
 

▲ 1932년 3월 12일 <동아일보> RS협의회 관계자 십팔명 금조에 송국

 


이관술이 참가한 반제국주의동맹

이관술은 제자들이 동맹휴업하고 이후 RS사건으로 연행되고 구속되는 시기에 교사로 안주하기보다 본격적인 항일 사상운동으로 첫걸음을 뗐다. 교사 신분을 넘어 본격적인 항일 사상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학교 안에서는 학생 독서회를 지도했고, 밖에서는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회(경성반제동맹)’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로 맘먹었다. 


반제동맹은 1930년부터 1933년 사이 곳곳에서 결성된 비밀단체를 일컫는다. 특히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 침공을 시작하면서 반제국주의 정서가 확대됐고 이에 항거하는 동맹조직이 확산됐다. 국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출병을 반대하며 반제동맹 조직을 늘려갔다. 


그중 경성반제동맹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와다 노리히또(화전헌인 和田獻仁) 등이 주도한 일본인 독서회 회원들과 조정래, 이재중 등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결성했다. 이들은 1932년 8월 26일, 이단우의 집에서 5인 회동을 통해 조선에서 가장 급박한 임무가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데 합의했다. 이후 조정래는 1932년 10월 와세다대 경제학부 출신 이순근을 접촉해 동참시켰다. 그리고 이관술은 이순근을 통해 11월부터 연결됐다. 


이관술이 참여한 경성반제동맹의 주요 활동 목표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공장 노동자, 학교의 학생 그리고 농민을 통일한 조직으로 한데 묶어내는 것이었다. 앞선 사회주의 조직들이 상층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하층부의 조직에 힘을 쏟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를 위해 공장에는 적색노조 세포를 만들고 학교에는 맑스주의 독서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관술은 학생부를 맡아 학교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관술이 참여하기 전 학생 조직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물꼬가 트인 셈이다. 이관술이 참여하면서 학생조직의 목표도 구체화됐다.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와 ‘수업료 감면’,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반대’,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 반대’ 등 10개 항목을 내걸었다.
 

▲ 1931년 11월 4일 <조선일보>, 반제동맹 활동 개요

 

▲ 1932년 2월 22일 <조선일보>, 동덕 여학생 중심 반제동맹 조직 책동

 


맥없이 체포돼 해산당한 경성반제동맹…이관술 첫 검거

이관술은 사상적 변화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1932년부터 중동고보 동창이었던 이순근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순차적으로 반제동맹에 참여하면서 학생 영역 활동의 폭을 늘리게 됐다. 반제동맹 산하 독서회가 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부기학관, 경성기독청년학관으로 확대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교내 독서회는 이경선, 임순득, 김영원, 박인순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여동생 이순금과 윤금자, 김길순이 가두독서회로 참가했다.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11월 하순, 12월에 동경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조선에서도 반제국주의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대표로 참가할 조정래의 여비 일부(30원)는 이관술이 보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석 달 뒤 일본 경찰에 활동이 발각되고 조직원이 체포되면서 대규모 검거가 일어났다.


이관술이 체포된 것은 1933년 1월경이었다. 임순득, 이경선, 김영원, 임택재와 함께 독서회 사건으로 종로서에 체포된다. 그중 임순득(1916∼?)은 이화여고보 3학년에 재학했던 1931년 동맹휴업을 주동했다가 경찰에 체포된 것 때문에 퇴학당해 1932년에 동덕여고보 3학년에 편입한 제자였다. 


임택재는 임순득의 오빠로 일본 유학 중 1931년 일본노동조합 오노다시멘트 분회 명의로 반일격문을 뿌렸다 검거되면서 제적당해 귀향한 상황이었다. 동생 소개로 이관술을 만났고, 1932년 10월부터 경성제국대학 진학 준비를 겸해 이관술의 집에서 하숙했다. 


이관술과 독서회 학생들을 체포한 종로서 경찰들은 단순한 교내 독서회로 판단했다. 하지만 반제동맹을 탐지해 수사해온 동대문서와 연결되면서 중대 사건으로 번졌고, 연행자가 계속 늘어났다.


최종 결과로 연행자 중 43명이 정식으로 경성지방법원에 송국됐고 이관술은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분류됐다. 이렇게 이관술은 첫 체포에 이어 구속까지 겪게 됐다. 이관술은 이때 동덕여고보 교사로 몸담았던 시기가 마감된다. 1933년 4월 26일 신문 기사를 보면 아주 짧게 이관술이 ‘사임하게 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 1933년 3월 12일 <동아일보>, 반제적화 획책하는 양대 비사 사건 송국

 

▲ 1933년 4월 26일 <조선일보>, 여학교 소식 중 동덕여고보 ‘이관술 사임’

 


혹독한 고문과 수감생활…23개월에 걸친 재판

경성반제동맹은 당시 신문에 유명대학 출신 엘리트와 학교 교사가 참여한 사건으로 대서특필됐다. 일본과 조선의 최고 학부를 졸업한 이들로 구성됐다는 점이 큰 관심을 끌었다. 첫 검거부터 재판 판결까지 22개월이나 진행됐고, 재판이 열릴 때마다 관련 기사가 이어졌다. 


이관술은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취조를 당했다. 지금까지 학교 교사로 존중받았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머리와 가슴을 움직였던 항일 사상운동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은 것이다. 고향집에 남아있던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두 달 뒤 동생 순금이 반제동맹의 아래 조직으로 발각돼 체포됐으니 집안의 충격은 곱절로 커졌다. 이때부터 이관술과 순금은 오누이를 넘어 평생 동지가 된다. 이관술의 회상기를 보면 “내 누이 동생 순금-이 뒤부터 나와 내 동지들과 같이 옥중과 지하의 온갖 반일혁명투쟁의 고난을 같이 하였다”고 말한다. 


이관술은 예심을 거쳐 본심 재판에 회부될 즈음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가석방된다. 1934년 4월, 체포된 뒤 15개월이 지난 때였다. 이관술이 석방될 때 느낀 감정은 먼저 반성하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무척 격앙된 상태였다고 본인의 회상기에서 고백했다. 


“1934년 4월에 옥문을 나오니 때마침 이재유 사건이 벌어져 경향에 검거 선풍이 대취하고 이재유 동무 역시 피검되었는데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 건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 사건으로 일망에 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 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되는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이관술은 출소의 기쁨보다 고향에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고 토로한다. ‘경성트로이카’를 이끌었던 이재유에 관련한 소식을 들으니 더욱 자신과 비교를 했다. 같이 체포된 이들보다 먼저 출옥하는 것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뒤에도 탈주에 성공한 이재유는 자신과 비교가 됐다. 이관술은 보석 석방된 기간 동안 고향 입암마을에서 몸을 추스렸지만 한편으로 계속 경성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탐문했다. 

 

▲ 1946년 4월 18일 <현대일보>, ‘반일지하투쟁의 회상 중-이재유 씨와 연락’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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