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문서에 숨은 역사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11-02 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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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예전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때 좋은 글쓰기 자료를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었지요. 비디오테이프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보았습니다. 흑백의 거친 선으로 표현된 애니메이션이었지요. 


한 여행객이 황무지를 여행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 양치기를 만났지요. 양치기는 좋은 도토리 씨앗을 고르고, 그것을 황무지에 심고 다녔지요. 수십 년이 흐른 뒤 여행객은 그 황무지가 너도밤나무 숲으로 변한 것을 보았지요. 사람이 살 수 없었던 그 땅에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꾸준한 노력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놓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길가 가로수에 내려앉은 가을 탓일까요? 왜 문득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 올랐을까요? 오늘 누군가의 하루에서, 묵묵히 황무지에 도토리 씨앗을 심고 가꾼 양치기의 모습을 엿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하루하루가 쌓여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궁금해집니다. 


연말이 다가오면 누구나 마음이 바빠집니다. 뭔가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지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말이 다가오면 특별히 바빠지는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있습니다. 기록관리 전문요원들이 그들입니다. 매일 쏟아지는 각종 문서를 검토하고, 지정된 보존기간을 가려 폐기와 보존을 결정해야 하지요. 생산된 모든 문서를 끝도 없이 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들 탓에 저도 조금은 바빠집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한국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그리고 권위주의 정부 시절을 거치며 사라지다시피 했지요. 기록의 소멸은 역사의 소멸이기도 하다는 반성이 있었고, 드디어 1999년에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지요. 2006년에는 법률이 개정되면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공공기관은 기록관리 전문요원을 고용하고, 해당 기관에서 생산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법령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즈음 울산에서도 기록관리 전문요원들이 고용되기 시작했지요. 기록물 관리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선에 배치된 기록관리 전문요원들은 불안한 고용상태에서 매일매일을 갈등하며 황무지에 도토리 씨앗을 심은 양치기처럼 맡은 일을 해왔지요. 


저는 지역사를 공부하고, 기록학 관련한 연구기관에 관여하는 탓에 여러 공공기관의 기록물평가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한 공공기관의 기록물평가심의회에 참여하였습니다. 3만 건이 넘는 폐기대상 기록물의 목록을 검토하고 난 뒤에 열린 회의였지요. 제가 검토한 폐기대상 기록물 목록은 기록관리 전문요원이 기록물 제목과 실제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일일이 검토하고, 기록물이 가진 역사적 가치를 평가한 뒤 저와 같은 심의위원들에게 검토를 요청한 자료이지요. 이처럼 보존기간을 넘긴 기록물의 폐기를 결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눈에 드러나지도 않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냐!’고. 또 ‘매일같이 쏟아지는 행정문서를 언제까지 쌓아둘 것이냐!’, 아니면 ‘정말 기록물을 평가할 전문능력이 당신에게 있냐!’고 말입니다. 이게 기록관리에 대한 현재의 인식인지도 모릅니다.


공공기관은 우리의 일상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기록물은 우리네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그런 까닭에 똑같아 보이는 기록물일지라도 그것은 현재의 기록이며, 미래에는 역사자료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공공기관의 기록물 보존과 폐기는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안정한 고용(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기록관리 전문요원 상당수는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과 기록관리에 대한 부족한 주변 인식에도 황무지에 씨앗을 심은 양치기처럼 고군분투하는 기록관리 전문요원들의 노고에 관심과 응원을 보냅니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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