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茶談) 정취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1-03-15 00: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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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예로부터 무인(武人)들은 바둑판을 앞에 두고 대화하고 문인(文人) 예술인들은 찻잔을 앞에 두고 정담을 나눈다. 요즘은 어디 분위기 좋은 커피숍을 찾아 달려가고 커피잔 앞에서 정담을 나누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얼마 전 친한 후배가 찾아와서 “오늘은 선배님의 차(茶)보다 좋은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자”고 했다. 청허당 좋은 차실을 두고 나는 후배를 따라나섰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어느 바닷가 작은 카페였다. 넓은 창가로 보이는 갯바위와 파도 그리고 진한 커피향 속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참 좋았다. 오래 앉아 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하면 좋겠는데 정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한 시간 만에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우리는 이 바쁜 시절에 무려 세 시간을 투자하며 커피 한잔을 했다. 가는 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대화하는 데 한 시간이다. 여유가 있어 유람이라도 즐기는 사람이야 괜찮지만 일상이 바쁜 사람들에게는 커피를 마시고 좋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길 내내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허당(淸虛堂) 차실(茶室)에 오는 손님은 대체로 네다섯 가지의 차를 마시며 세 시간 정도 앉아 정담을 나눈다. 물론 잠깐 머물다 가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십 잔의 차를 마시는 것 같다. 차(茶)라서 가능한 것이다. 물이나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실 수는 없다. 이는 내가 찻 자리를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찻 자리의 정담을 다담(茶談)이라 하고 차향과 함께 다담의 정취가 차실에 가득함을 느끼게 된다. 중국에서는 세 가지 친구가 있다. 술친구와 밥친구 그리고 차친구다. 그중에 차친구(茶明友:차펑요우)를 제일로 친다. 한국에서는 술친구란 말은 있어도 차친구란 말은 없다. 다담 정취를 나누며 함께하는 친구가 최고라는 것이다. 차는 술과 커피와 달리 많은 잔을 나눌 수 있어 좋다. 정성을 다해서 내어놓는 차 한잔을 마시면 절로 차 대접 잘 받았다는 인사를 하게 된다. 차를 내리는 팽주(烹主)의 정취를 느끼며 지란지실(芝蘭之室)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차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인스턴트화된 차가 시중에 나오고 있다. 차를 분말로 만들어 봉지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다. 좋은 차 성분을 아는지라 건강에 좋은 차를 커피 마시듯 큰 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분말 보이차 하나를 넣어서 선 채로 마시고 나간다. 물론 건강을 위해 차를 마시는 것이 마시지 않는 것보다 좋지만 수천 년 동안 형성돼 온 차와 차문화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이다. 차의 철학적 사유와 오랜 전통 속에서 천착된 문화를 배제한 채 마시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다담정취(茶談情趣)라는 말은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를 찾고 찻자리에 앉으면 자연스레 진실한 대화를 나누게 되고 차향과 더불어 아름다운 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심전심으로 나누는 다담정취가 없는 찻자리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비록 방안에 있지만 차를 마시며 천하의 이치를 나누는 차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찻잔에 한 자락의 심사를 담아 나누며 고개 끄덕이는 차친구가 찾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이기에 이제는 잠깐 멈춰 서서 살아온 삶의 뒤안길을 더듬어 보고 싶다. 조급한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찻잔을 나눌 수 있는 차친구가 있다면 차상 위 준비된 등잔에 불붙이고 기다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친구가 손짓하면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만 같다. 남쪽으로부터 봄의 전령사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봄소식과 함께 좋은 차친구가 찾아오기를 기도해야겠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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