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동지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를 함께 이끈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5-12 0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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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5)

이관술은 병보석으로 가석방된 후 고향 입암마을로 내려왔다. 심한 고문과 감옥살이로 몸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비록 거짓이라도 반성문을 쓰고 내려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빨리 털어버리고 동지들이 있는 경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관술의 발을 붙잡는 가족들의 성화로 넉 달 이상 머물러야 했다. 그때 막내딸 경환이 잉태된다. 1934년 여름 고향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과정은 마치 태풍의 눈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 1기 활동

이관술은 본인의 회상기에서 밝힌 대로 경성에 올라가자마자 이재유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재유와 그가 이끈 경성 트로이카가 자신을 비롯해 경성반제동맹을 결의했던 동지들보다 훨씬 더 철저한 투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이는 이재유가 서너 살 적었지만 사회주의 활동에서는 훨씬 앞서 있었다. 이재유는 일본 유학 때인 1927년부터 신간회 활동과 동경지역 노동조합에 참가했다. 


이재유는 동경에서 활동하는 동안 경찰에 70여 차례나 검거될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섰다.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8년 8월 체포돼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조선으로 압송됐다. 1932년 12월 만기 출소한 후 곧장 공산당 재건과 적색노조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과 1934년 사이 경성에서 잇달아 벌어진 적색노조 파업을 이끌던 사회주의 계열 중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 그룹은 남달랐다. 이관술이 속했던 반제동맹 역시 결성 당시 아래로부터 조직을 앞에 내세웠으나 실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제대로 된 활동을 펴보지 못하고 검거됐을 때, 모든 신문이 일제 검·경의 해설대로 ‘최고학부 출신’ ‘인텔리 그룹’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관술이 반제동맹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시기에 이재유가 이끌었던 조선공산당 재건그룹은 ‘경성 트로이카’란 별칭으로 불린다. 안재성 작가가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2004, 사회평론)로 더 많이 알려졌다.


‘트로이카(тройка)’란 삼두마차를 뜻하는 러시아 말이다. 세 마리 말이 같은 힘으로 달리는 것처럼 상부 지시만 기다려서 수행하는 수동적 조직이 아니라 세 명이 묶인 소그룹이 서로 연결되도록 했다. 그리고 세 명은 수평적으로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했는데, 새롭게 결합하는 노동자와 농민들도 같은 틀로 조직했다.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 방식으로 경성 안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사회주의 그룹을 통일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 방향은 이재유의 재판에 제출된 조서 속 슬로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일제 검찰 심문조서 속 이재유 그룹의 슬로건. 출처: <이재유 연구> 김경일, 1993.

이재유가 경성에서 출옥한 후 1년을 조금 넘긴 1934년 1월, 서대문경찰서에 다시 체포될 때까지를 경성 트로이카 1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이재유 그룹은 편창제사공장(1933. 5), 별표고무공장, 소화제사공장(이상 1933. 8), 서울고무공장, 조선견직공장, 영등포철공장, 고려고무공장, 종연방적공장, 경성고무공장(이상 1933. 9)의 파업을 이끌었다.

이재유 체포, 탈출 그리고 또 다시 체포, 탈출

이관술이 반제동맹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동생 이순금은 이미 이재유 그룹과 연결돼 있었다. 오빠 이관술이 없었기 때문에 익선동 집을 회합 공간이나 안가로 사용했다. 익선동 집은 경찰의 검거가 시작된 뒤에는 이재유의 피신 공간이 됐다. 

 

▲ 이재유가 경찰에게 체포됐던 익선동 집. 이관술과 이순금이 살던 곳이다.

검거망이 조여들면서 1934년 1월 18일 익선동 안가에 들렀다가 이동하던 이재유가 서대문서 형사에 의해 검거됐다. 경찰은 이때 이재유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의심만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이재유는 용변을 보겠다고 시간을 끌면서 창문을 깨고 탈출했다. 그리고 이틀 뒤 또 다른 안가에서 이순금 등이 체포됐고 이재유는 가까스로 피신했으나 결국 거리에서 체포됐다. 이때 경성에서만 200여 명이 검거됐으니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된 뒤 온갖 고문을 받았다. 경찰은 굴복하지 않는 이재유의 정신을 괴롭히고 육체를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만들어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던 때 3월 중순, 오히려 취조하다 지친 간수가 조는 틈을 노려 경찰서 창문을 넘어 탈출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미국 영사관으로 들어간 이재유는 서대문 경찰서에 다시 인도된다. 당연히 보복을 겸해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4월 13일 밤, 이재유는 또 한 번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했다. 검사가 작성한 탈출 과정 전모를 보면, 4월 초 수갑을 풀고 지내게 된 뒤 재탈출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고 한다. 이재유는 밥알을 짓이겨서 족쇄 안에 넣어 형을 떴고, 그 뒤 우유통 뚜껑을 형에 맞춰 열쇠로 변형시켜 족쇄를 열었다고 한다.


또 다른 탈출설로는 모리다라는 일본 순사의 암묵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순사는 천황주의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이재유가 설득했고, 호감을 느낀 순사가 느슨하게 탈출 기회를 건넸다는 설이다. 두 가지 중 어떤 하나가 진실일 수 있고, 두 가지 설이 하나로 합쳐져 탈출이 성공했을 수도 있다. 


이재유는 서대문서를 빠져나와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의 집으로 향했다. 미야케는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로 동숭동(현 서울 대학로 근처) 관사에 부인과 살고 있었다. 이재유는 미야케가 조선에 오기 전부터 사상적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찾아갔던 것이고, 미야케는 그런 이재유를 지하 토굴을 파고 은신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재유는 그렇게 38일 동안 토굴 생활을 하면서 몸을 추스리고 다음 행보을 계획했다. 5월 21일, 미야케가 체포된 뒤까지 숨어 있다 며칠 후 완전히 피신하면서 경찰의 체포망을 벗어나 잠적하게 된다.
 

▲ 이재유가 두 차례 탈출을 감행하고, 성공했던 서대문경찰서. 출처: 조선일보.
이관술, 제자 박진홍을 통해 이재유를 만나다

이재유의 탈출 사건은 신문에 몇 면에 걸쳐서 실릴 만큼 큰 소식이었다. 일제 경찰은 이재유가 조선을 탈출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내놓으면서 참담함을 느꼈다. 이 사건은 조선인들에게 이재유를 ‘신출귀몰’한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게 만든 무용담과 같았다. 이관술이 본인의 회상기에서 언급했던 ‘이재유 사건’처럼 수많은 조선인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관술이 병보석으로 석방돼 고향에서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무렵 이재유는 박진홍과 부부로 위장해 살고 있었다. 이관술의 제자였던 박진홍은 이순금, 이효정, 이종희 등과 함께 동덕여고보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다 제적당한 뒤 공장에 들어가 적색노조 활동을 해왔다. 박진홍은 그 과정에 경성 트로이카의 조직원이 됐고, 검거 과정에서 이재유와 유치장에서 만나 알게 됐다고 한다. 


1934년 9월, 이재유가 먼저 박진홍을 통해 이관술과의 만남을 조심스럽게 탐문했다. 서울에 돌아와 있던 이관술은 오랜만에 재회한 제자와 만난 기쁨만큼 이재유와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10월 초, 이관술은 박진홍과 장충단 뒷산에 있는 약수터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나갔다. 그날 약속장소에 나온 이는 박진홍이 아니라 바로 이재유였다. 


처음 만났지만 두 사람은 낯설지가 않았다.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을 통하기도 했지만 이관술이 반제동맹 사건으로 연행됐던 과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관술 역시 늘 마음에 품고 소망했던 만남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장충단에서 남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뒤 주변을 피해 처음으로 깊은 대화를 이어 갔다. 이관술은 논리와 행동 모두 명석함이 돋보이는 이재유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특히 반제동맹 사건에 철저하지 못했던 활동과 반성문을 쓰면서 석방했던 것에 대한 자기비판을 가감 없이 들려줬다. 아울러 지식인이란 허울을 벗고 공장 노동자로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결의도 보였다. 그런데 이재유의 반응이 남달랐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지식인이라는 조건을 부정하는 것은 자격지심으로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런 태도가 ‘인텔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발상이며, 오히려 갖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이재유 본인이 저지른 여러 실수와 오류에 대한 자기비판을 들려줬다. 이렇게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가 지닌 결함을 드러내면서 허심탄회하고 치열한 토론에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의기투합하는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진 것이다.

이관술이 합류한 경성 트로이카…은밀한 지하활동으로

이관술은 그 뒤 경성 트로이카 2기에 결합하게 된다. 이관술과 이재유 외에 트로이카 지도부의 한 자리는 경도제대에 유학했던 박영출(朴英出)이 채웠다. 그즈음 이관술은 1934년 12월 병보석 상태에서 출석한 경성반제동맹사건 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전이라면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감옥에 남겨진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 속박이 됐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수배자 신분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에 출석해 일단락을 짓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권했다. 실제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관술의 경우 집행유예로 형이 확정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경성 트로이카 2기는 시작부터 안정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 1935년 1월에 박진홍과 박영출을 비롯해 42명이 일제 경찰의 대규모 검거 과정에 차례로 체포된 것이다. 앞서 트로이카 1기 적색노조 건으로 체포된 뒤 풀려나 복귀했던 조직원들이 다시 체포되기도 했다. 최종 재판에 회부될 때는 153명까지 늘어난다. 

 

 

▲ 1935년 5월 7일, 경기도경찰서에 정리한 경성 트로이카 2기 조직도.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세 명이 트로이카 지도부가 된다. 아래 이재유 옆에 박진홍의 이름이 보인다. 출처: 국사편찬위 데이터베이스.

이재유는 귀가 시간을 정해놓았던 박진홍이 돌아오지 않자 안가를 떠나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이관술의 거처에서 만난 이재유는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 추가 검거가 계속되는 것을 확인하고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떠날 때는 각자 삽과 괭이를 멘 농사꾼 행색을 갖췄다고 한다. 

 

▲ 1934년 12월 21일 <동아일보> ‘反帝同盟(반제동맹)도 判决(판결)’

 

▲ 1935년 8월 24일 <동아일보> ‘송국 전후 총인원 153명’

이관술은 이재유와 함께 강원도까지 피신했고, 어느 때는 폭설로 뒤덮인 깊은 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그러다 동상에 걸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렇게 1935년 3월, 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도착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도봉구 창동이지만 당시에는 경성에서 북쪽 외곽 지역에 속하는 농촌 마을이다. 

 

▲ 1935년 8월 24일 <조선일보> ‘동덕여교 졸업 후 여직공으로 잠신’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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