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국가정원에서 그 이름 사라진 열녀강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기사승인 : 2021-10-27 00: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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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100리길 탐사(2)

열녀강의 발원지 ‘태화저수지’

중구 태화동과 유곡동에 걸쳐 있는 저수지로 열녀강의 발원지다. 면적이 약 1만 평, 깊이가 약 5미터다. 한때 양어장으로 이용됐다. <울산부여지도 신편읍지>(1786)에 ‘태화제(太和堤)는 고을 서쪽 6리에 있다. 길이 300척이고, 너비 370척이고, 지금은 없다.’고 기록돼 있다. <영남읍지>(1871)에는 이와 다르게 길이 400척으로 돼 있고 현존 여부는 기록돼 있지 않다.
 

▲ 태화연


태화강 남쪽 둑을 가렸던 수백 그루의 버드나무 홀연히 사라져

심원열(沈遠悅, 1792~1866) 울산도호부사가 1855년(철종 6년)에 부임했다. 태화강 남쪽 둑에 수백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몇 해 사이에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백성들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올봄에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베었습니다. 부내(府內)에 사는 백성 중에 태화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아 점쟁이에게 물어보니, 버드나무 가지가 축축 늘어진 모습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친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일시에 도끼로 베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심원열은 이렇게 말했다. “버드나무는 잘 자라는 나무이고 베어져도 뿌리에서 싹이 돋을 것이니 전날의 무성함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면 농부들은 옷을 벗고 더위를 식히고, 장사꾼은 어깨를 쉬면서 더위를 가실 수 있을 것이다.”
 

▲ 김기봉 공로비


위용 되찾은 조선시대 영남 3루 ‘태화루’

태화루는 조선시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영남 3루로 전해지고 있으며, 수많은 선인이 태화루의 빼어난 풍광과 정취를 노래한 시문(詩文)을 남겼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와 643년(선덕여왕 12) 울산에 도착해 태화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태화루는 태화사 경내에 조성된 누각으로 황룡연(黃龍淵)이 내려다보이는 태화강변의 절벽 위에 세웠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태화루는 울산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중수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에 낡아 허물어졌거나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광역시는 2011년 9월 착공해 2014년 5월 14일 태화루 경내에서 ‘태화루 준공식’을 개최했다.

 

▲ 학 암각화(왼쪽)와 관어대(오른쪽)


층간 소음에 뿔난 용금소의 황룡, 태화루 연회 중에 술잔 뺏어 가

옛날에 어떤 달관(達官)이 일찍이 태화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고 술잔을 돌리는데 은 술잔이 갑자기 황룡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에 능숙한 어부를 시켜 물 바닥에 들어가 술잔을 찾도록 했다. 3일이 지난 뒤에 그 사람이 은 술잔을 가지고 나와서 말했다. “못 속에 석굴이 있기에 그 입구로 들어갔지요. 북쪽으로 1리쯤 가니 큰 궁전이 있습디다. 주인 노릇 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거동과 호위가 매우 흥성한데 ‘내가 사는 곳 위쪽에서 세상 사람들이 늘 시끄럽게 굴어서 내가 매우 싫어하노라. 술잔을 빼앗아서 경계하는 뜻을 보였으니, 너는 마땅히 돌아가서 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굴의 거리가 백양사(白楊寺)에 이를 정도인데, 그 북쪽은 절의 북쪽에 있는 순채(蓴菜)못과 통하는 듯합니다.”(<학성지>(1749) 기록)

 

▲ 태화루와 황룡연
▲ 태화강과 열녀강의 합수 지점

물에 빠져 죽어 이름 얻은 ‘강순내’

중구 유곡동에서 흘러내려 태화루 동쪽으로 흘러 태화강과 만나는 하천이다. 70~80년 전에 새각단에 강순이와 어머니, 남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큰비로 수패골못이 터져서 강순 모녀는 물속에 휘말려 떠내려가 버렸다. 그 후에 개가 하류에서 모래를 파고 있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그곳을 확인해 보았는데, 강순의 시체가 묻혀 있었다. 그 후 주민들은 그 하천을 강순내라고 불렀다.

노 젓는 나룻배로, 줄 당기는 거룻배로 오갔던 ‘태화나루’

태화나루는 최근 복원된 태화루 남쪽과 남구의 월평(月坪), 월진(越津)마을을 연결하던 나루터다. 옛날에는 노를 저었던 나룻배를, 일제강점기에는 줄을 잡아당기는 거룻배를 이용했다. 이 나루터에 대해서 울산 최초의 읍지 <학성지>(1749)에 태화진(太和津)의 북쪽 수십 보(步)에는 황룡연이 있고, 못 옆에는 바위가 언덕을 이뤄서 기우제를 지낼 때 장막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나락보다 비쌌던 대나무 ‘오산대밭’

오산대밭은 일제강점기에 큰물이 져서 주위가 온통 백사장이 됐을 때 일본인 오까다(岡田)가 헐값으로 사서 조성했다. 3년 자란 대나무는 베어 묶어서 뗏목에 매어 태화나루를 지나 울산역에서 기차 짐칸에 실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팔았다. 또는 대나무단을 뗏목에 맨 채 방어진, 장생포, 내황에서 다른 곳으로 배에 실어 여러 곳으로 팔았다. 대나무로 만든 우산 공장이 태화동에 3~4군데 있었는데, 처음에 공장은 오산에 있었다. 우산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일본으로 수출했다. 일본에서는 슈퍼마켓, 호텔 등에서 일회용 우산을 영업 차원에서 무료로 나눠줬다. 대나무밭 조성 당시에는 대나무가 나락보다 훨씬 비싸 밭에 심어 한때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이언적(李彦迪)의 칠대 손이며 이황(李滉)의 칠대 외손, 열녀강의 주인공 ‘여강 이 씨’

이 씨는 박취문(朴就文)의 증손인 박종규(朴宗奎)와 혼인했는데 반년 만에 지아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바로 남편을 따라 죽는 것도 생각했지만 몸소 지아비의 초상을 돌보고 시부모를 위로하고자 초상을 치른 후에 남편의 뒤를 따라 음독자살했다. 온 고을의 인사들이 암행어사와 경상감영에 일제히 호소해 조정에서 남편에게는 호조좌랑, 이 씨에게는 정부인의 증직이 내려졌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열녀각은 유실되고 비석만 남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옛 열녀각 앞으로 흐르는 강이라 하여 열녀강(烈女江)이라 부른다.

 

▲ 여강이씨 열녀비

 

▲ 여강이씨 정려각

 

▲ 태화강국가정원 안내도. 열녀강의 이름이 ‘실개천’으로 돼 있다.


달그림자 숨는 ‘은월봉(隱月峰)’

은월봉은 남산12봉 중에서 서쪽 기준으로 마지막 봉우리로 정상에 은월산성 터가 있다. 울주팔영 중의 한 곳으로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은월산(隱月山)으로 기록돼 있다.

주민들은 굶어 죽고, 남산굴(南山窟)은 배 터져 죽고

이 굴은 2차 대전 말기에 평상시에는 군량미 비축 창고로, 전시에는 방공호로 이용할 목적으로 판 것이다. 원당, 팔등, 소정, 거마 등 현재의 신정동과 옥동 주민들의 식량을 수탈해 마대자루에 넣어 소달구지로 실어와 채워 넣었다고 한다. 광복이 돼 이 굴을 열었을 때 쌀과 콩 등의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이 썩어 있었다고 한다. 이 굴에서 1980년대에 누군가가 막걸리를 파는 술집을 경영한 적이 있다.

 

▲ 태화강 동굴피아

봄을 감춘 언덕, ‘장춘오(藏春塢)’

권근은 <대화루기>에 “고을 몇 리 되는 곳에 큰 내(川)가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동쪽으로 꺾이는 곳에 물이 더욱 넓고 깊으니 이곳을 황룡연이라 한다. 동쪽으로 도는 곳에 산이 높다랗게 내 남쪽에 버티고 섰는데, 이름 있는 꽃과 이상한 풀, 해죽(海竹)과 산다(山茶)가 겨울에도 무성하여 장춘오라 한다”고 기록했다.

 

▲ 장춘오로 추정되는 터


팽(烹) 당할 뻔했던 처용리의 팽나무, 십리대밭의 지킴이로 우뚝 서다

이 나무는 울주군 온산읍 처용리의 이른바 포구먼당을 300여 년 동안 지켜왔다. 이곳에 신산업단지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몰려 울산광역시가 2009년 4월 10일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 이 나무는 십리대밭교 입구에서 태화강 십리대밭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 태화강백리길 탐사팀

 

▲ 태화루에서 시 낭송

글=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사진=김정수 사진작가

 

※ 이 글은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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