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소종, 가을날의 차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 기사승인 : 2021-11-02 00: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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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계절에는 냄새가 있다. 온도나 초목의 변화가 있기 전에 이제 곧 바뀌게 될 계절의 미묘한 향기가 바람에 섞여 불어온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직 아무것도 없는 때에 바람 속에 녹아 있는 이른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면,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하고 매몰된 일상에서 온전한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한다. 


늦여름 지친 퇴근길에 문득 가을의 냄새를 맡는 순간, 유년기의 어느 가을날 옛 동네 골목길이 펼쳐진다. 타오르는 노을과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된장찌개 냄새, 친구의 웃음소리, 뺨에 닿는 쌀쌀한 바람과 엄마가 짜준 니트의 포근한 감촉까지. 


후각이 불러오는 기억의 힘은 대단하다. 중간과정을 거치는 다른 감각들과 달리 후각은 중간과정 없이 바로 뇌에 전달되며,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연결된다. 그래서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순식간에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마스크가 하나의 피부처럼 돼버린 후 나는 계절을 잃었다. 한 해 한 해 켜켜이 쌓아오던 계절마다의 기억도 잃었다. 계절의 변화를 사람들의 옷차림과 일기예보로만 겨우 체감할 뿐이다. 그저 춥거나 덥거나 혹은 비가 안 오거나 덜 오거나 많이 오는 단조로운 날의 연속일 뿐이다. 


올해는 10월 초까지 늦더위가 계속되다가 바로 겨울 날씨가 찾아오는 바람에 진짜로 가을이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여전히 가로수들은 초록색이거나, 아예 푸른 잎을 떨구고 있다. 10월 이맘때면 늘 당연하듯 찾아오던 가을의 색과 향들이 그립다. 차 상자에 가득 담아둔 계절 중에 가을을 찾아본다.

정산소종(正山小種, / 랍상소총 Lapsang souchong)

마른 잎에서 나는 그을음내. 황량한 들판의 마른 풀냄새.
가을비 내리고 난 뒤, 산자락에 내려앉은 안개. 토독토독 상수리나무 낙엽에 떨어지는 빗방울. 비에 젖어 반들거리는 단풍잎,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풀 향기, 흙내음에 가까운 가을 산 냄새가 피어오른다. 비에 젖은 소나무 껍질의 향기. 젖은 낙엽을 그러모아 태우는 매캐한 연기와 가을 산의 달콤한 공기.
낮게 깔린 안개와 낙엽 태우는 연기 사이로 가을들이 켜켜이 내려앉는다.

정산소종은 중국 푸첸성 무이산에서 생산되는 홍차다. 본래 반발효차인 우롱차 생산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어서인지 우롱차와 같은 큰 잎을 쓰고 가공과정에서 소나무를 태워 건조시키기에 훈연향이 특징이며 호불호가 강한 차다. 중국 3대 홍차로 영어로는 랍상소총, 얼그레이가 이 차를 따라 하려다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을 만큼 서양에서 사랑받는 차다. 중국에서 정식으로 생산되는 정산소종은 워낙 소량이라, 시중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차는 보통 랍상소총이라고 부르고 그 둘을 다른 차로 구분하기도 한다. 


생산된 곳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같은 차라고 해도 사람마다 정산소종의 향을 매우 다르게 느끼는데, 소나무 태우는 향기, 낙엽 태우는 향기, 정로환 냄새, 한약재 냄새, 사우나 냄새, 치과 냄새, 소시지 굽는 냄새 등으로 표현한다.


나는 대체로 비에 젖은 소나무 껍질 향과 함께 낙엽 태우는 향기를 느낀다. 어린 시절 어느 때인가 늦가을 산행에서 약초꾼의 산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날 가을 산이 참 아름다웠다는 것만 흐린 감상으로 남아 있던 기억이었는데, 랍상소총을 마시자 그날의 한 장면이 재생되듯 생생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안개가 깔린 산의 색과 모양, 비가 내린 후 산의 냄새, 가을 산이 내는 소리도. 차 한 모금에 그립고 그립던 가을날의 한 장면으로 들어간 듯 눈 앞에 펼쳐지고 그날의 온도, 냄새, 소리, 색깔, 감정마저도 살아났다. 차 한 잔에 흐려지던 소중한 기억을 찾았다. 첫 만남 후, 랍상소총은 나에게 ‘가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차가 됐고 언제 어느 때든 차를 통해 그날의 가을 산에 갈 수 있게 됐다. 


일기예보를 보니 곧 예년의 가을 기온으로 돌아올 것 같다. 하지만 곧 우리는 진짜 계절을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년 사이 세계적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현상을 계속 겪고 있다. 사막 지역에 혹한이, 냉대기후에 폭염이, 어느 지역에는 계속 물 폭탄이 이어지고, 어느 지역에는 산불이 연일 일어났다. 한 나라나 한 지역의 문제는 곧바로 인접한 다른 지역의 문제로, 다시 또 다른 지역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차와 커피 같은 기호식품의 작황은 기후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가을은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을까? 어쩌면 곧 차 한 모금으로 가을을 만끽하는 일마저도 어려워질지 모를 일이다.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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