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최미선 시민인문학교 교장 / 기사승인 : 2021-07-14 00: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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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숲 시즌2-방황



헤르만 헤세의 작품의 특성


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시민인문학교 교장=한 인간의 평생의 구도 여행에 동참한 듯 읽으면서 숭고해지는 책이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김수복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인문강사=헤르만 헤세의 대부분 작품에는 일관되게 연결되는 키워드가 있죠. 그것은 ‘종교’와 ‘자아’로 정리할 수 있어요. 헤세가 말하는 종교는 어느 특정 종교가 아니라, 종교가 가지는 보편적 성격으로서 ‘종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종교와도 일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종교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죠. 헤세의 작품에는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따라 다녀요. 헤세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갈등 구조는 외부와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내면세계의 갈등이 주를 이룹니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하나 됨을 이루려 합니다.

쉽게 쓰지 못한 소설, 싯다르타


최미선=헤세는 이 책을 쉽게 쓰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과정을 소개해주세요.


김수복=1919년 발표한 <데미안>이 성공을 거둔 후 <싯다르타>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 1부, 즉 아트만을 찾아 정진하는 청년인 싯다르타를 묘사할 때는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본격적인 자신과의 갈등과 그 갈등을 헤쳐나가는 2부에서는 계속 써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칼 융을 만나 정신 분석을 몇 차례 받기도 했고요. 그와 동시에 인도 관련 서적, 중국의 고전, 특히 노자나 장자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다시 정리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후에 다시 집필해서 1922년에 이 책을 완성했죠. 이는 “체험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글은 쓸 수 없다”는 헤세의 글쓰기에 대한 기본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싯다르타, 책 속으로


최미선=책의 구성과 줄거리를 소개해주세요.


김수복=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어요. 1부에는 4개의 소제목, 2부에는 8개의 소제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구성을 사성제와 팔정도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1부와 2부는 대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구조에요. 1부 싯다르타의 고민과 번뇌, 삶과 종교에 대한 물음은 2부에서 싯다르타의 체험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간다고 볼 수 있어요. 1부에서 싯다르타가 아무런 의문 없이 목욕재계를 했던 강은 2부에서는 그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죠. 1부에서는 자아를 벗어나기 위해 왜가리, 부패한 시체, 돌, 나무, 물이 되었으나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죠. 그러나 그 윤회의 끈은 2부에서 싯다르타의 단일성과 전일성을 돕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1부에서 평범한 사람의 생활은 싯다르타에게는 거짓이었고 악취를 풍기는 것이었지만, 2부에서 싯다르타는 평범한 사람들이 ‘현자’임을 깨닫죠. 1부에서의 싯다르타가 명상, 침잠, 단식, 호흡을 멈추는 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 삶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고통과 삶의 무의미함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2부에서는 그러한 싯다르타의 행동이 스스로에 대한 오만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형이상학적 진리가 있음을 확신한 청년 싯다르타가 체험을 통해 자신을 찾고 발견해 나가는 과정,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인생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내 친구 고빈다


최미선=싯다르타가 구도하는 길에는 동무가 꼭 있어요. 고빈다, 카밀라, 바스데마 등, 그 각각이 일정 기간 동안 동행하면서 때가 되면 또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고 다시 헤어집니다.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고빈다는 어떤 인물인가요?


김수복=저는 이 소설 속에서 저랑 가장 유사한 인물이 고빈다가 아닌가 싶었어요. 제 과거의 모습 속에서 고빈다의 모습을 많이 발견했어요. 샘은 어떠신가요? 혹시 유사한 인물이 있었나요? 일단, 카바스바미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재력과는 거리가 멀죠. 대체로 책을 가까이하거나 열독하시는 분들은 고빈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을까 싶어요. 고빈다는 배움으로 어떤 경지나 열반에 오를 수 있으며, 절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죠. 하지만 그것이 그의 한계이기도 했죠.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 이론이나 이상에 갇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이죠.

여인 카말라


최미선=기생 카말라, 연인이면서 싯다르타 아이의 엄마였고 그녀 또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인물로 생각하세요?


김수복=카말라! 싯다르타가 세속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처음으로 만난 여성이죠. 그리고 싯다르타에게 몸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인물이기도 하죠. 평범하지 않은 여성이죠. 어떻게 보면 카밀라가 싯다르타를 알아본 거죠. 보통 인물이 아님을. 싯다르타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싯다르타에게 그의 아들을 통해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번뇌를 경험하게 해 준 인물이죠. 싯다르타가 전일성으로 나아가는 데 바수데바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죠. 바수데바가 정신적인, 형이상학적인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전일성을 도왔다면, 카말라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전일성을 도와준 거죠. 바수데와 카밀라의 합일로 온전한 싯다르타가 될 수 있었죠.

뱃사공 바스데바


최미선=바스데바는 가장 경지가 높은 인물이에요. 혹시 인생에서 바스데바 같은 인물이 있었나요? 아니면 그런 책을 만난 적이 있나요?


김수복=저에게는 헤르만 헤세와 그의 책이 바스데바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경청하는 자, 들어주는 자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어요. 싯다르타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바수데바에게 말하고, 바수데바는 묵묵히 들어주죠. 그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의 이야기가 바수데바를 통해 정화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 치유됨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감히 바스데바와 같은 친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다고 할까요. 자주 보지는 못한지만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같은 고민을, 그 친구는 생활 속에서, 저는 책을 통해 고민하고 있더군요. 언제나 그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은 마음의 평안을 얻고 돌아옵니다.

강물


최미선=강물의 비유, 단 한 번도 같은 강물일 수 없다는 무상성과 그럼에도 강물이라는 동일성에 대한 상징으로 보여요. 2부를 이끌어가는 주요 흐름인데요. 강물의 상징성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김수복=강물의 현재성과 동시성, 그리고 시간! 싯다르타가 바수데바에게 자신의 삶도 한 줄기 강물과 같다고 말하죠. 소년 싯다르타, 청년, 장년, 노년 싯다르타가 분리돼 있지 않으며, 싯다르타의 전제도 과거가 아니며, 그의 죽음이 미래가 아니라고 말하죠. 모든 것이 실재이며 현재라고 말하죠.


강물은 어디에나 동시에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것,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시간도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잖아요.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 있죠. 그럼에도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시간,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죠. 영원한 현재성! 그 현재에 제가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져요. 


또한 싯다르타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 즉, 브라만인 아버지, 친구 고빈다. 카말라, 또 다른 차원의 번뇌를 알게 해 준 아들을 한 데 아우르는, 그 사람들 각각의 아우성 소리로 들리던 강물의 소리가 조화의 소리, 화합의 소리로 들렸을 때 숙연해짐을 느꼈죠. 


최미선=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점점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서구의 철학사하고도 맥을 같이 하고 있어요. 나와 타자, 이성과 감성, 신체와 영혼의 구분이 점점 하나로 수렴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어요. 자신과의 화해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이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김수복=우리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지, 아니면 우리가 받아온 교육 때문인지, 우리는 구분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옳고 그름 등으로 말이죠. 이런 행동의 기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너와 달라’, 또는 ‘나는 특별해’ 하는 차별화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부정적이거나 좋지 못한 것은 감추려 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죠. 이것은 전부가 아니죠. 일부분일 뿐이죠. 


하루도 낮과 밤이 있어야만 하루이듯이, 동전도 앞면과 뒷면이 있어야만 온전한 것이 되듯이, 우리 마음속에 밝은 것, 좋은 것만 있어서는 온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싯다르타가 오로지 정신적인 면, 형이상학적인 것만으로 아트만을 찾을 수 없어 경험의 세계로 나아갔듯이 말이죠. 자신과의 화해,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신과의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최미선=싯다르타가 구도 여행에서 극복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아들 싯다르타였어요. 아들을 둔 엄마의 입장에서 공감이 많이 갔을 것 같아요. 


김수복=싯다르타의 아들 덕분에 싯다르타가 온전하게 전일성, 단일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많죠. 하지만 자녀와의 관계는 또 다른 차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 덕분에 성장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싯다르타가 사문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나면서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 정제돼 있지만 자식에 대한 불안, 염려, 노여움이 섞여 있는 아버지의 복잡한 감정, 브라만이지만 자녀와의 관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싯다르타의 아들이 아버지인 싯다르타에게 내뱉는 말들 속에서, 인생은 윤회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를 대할 때, 대통령의 자녀가 우리 집에 와 있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는데요. 웃음이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방향과 한계


최미선=아트만과 무상성, 이 둘은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에요, 변하지 않은 진리의 본체를 상징하는 아트만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성, 결국 헤세가 이 둘의 결합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수복=아트만은 ‘숨’, ‘혼’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자아’ 또는 ‘진아’라는 의미라고 번역하죠.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무상성에, 진아, ‘진실된 나’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사문 시절의 싯다르타가 괴로워했던 이유는 자아를 버리고 수많은 다른 것, 죽은 고라니, 나무, 돌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버린 듯했으나 결국에는 싯다르타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말잖아요. 이때의 싯다르타는 사물의 배후와 본질이 있다고 전제하고 끊임없이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물은 그 자체로 있는 것, 지금 현재 있는 싯다르타가 싯다르타인 거죠. 그렇듯이 ‘진아’와 ‘무상성’은 얼핏 대립되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지금 현재,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일치하는, 합일하는 사상 아닐까요.


또한 ‘진아’라는 의미가 고정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불교에서는 그 ‘무(無)’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군요. 헤세에게서 진아와 무상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신과의 괴리감을 좁히기 위한 노력이라고 봅니다. 또한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말하죠. 말이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라고요. 언어가 지니는 한계에 매몰되지 말기를 충고하잖아요. 


최미선=저는 가장 와 닿았던 테제가 깨달음은 결코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부처가 깨달았으나, 그 사실은 전달이 되나 깨달음이 제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죠. 결국은 체험의 영역이고 각자의 영역이에요. 싯다르타도 고타마를 만나서 그 점을 알고서 혼자서 구도의 길을 간 것이고요. 반면에 고빈다는 깨달음을 전달받으려 했다고 봐요. 혹시 샘에게 가장 와 닿았던 테제가 있었나요?


김수복=저는 이 부분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요. 궁극적인 깨달음은 자신만의 유일한 체험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전 단계까지는 배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싯다르타가 자신의 체험만이 유일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행동은 배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봐요. 고빈다처럼 배움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그 틀을 깨지 못하는 한계점을 극복한다면, 그 배움의 과정도 의미 있다고 봐요. 현재의 나는 지나온 나의 과정이라 본다면, 의미 없는 것은 없으니까요.

현재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최미선=결국 끊임없는 현재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그 현재 안에 모든 시공간이 들어 있다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어요. 이 현재성, 이것도 관념이 아닌 체험의 영역인 것 같아요. 혹시 이 현재성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나요? 


김수복=현재성!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거잖아요. 저는 어느 정도 과거에 방점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가 있는 건 과거가 있기 때문이고, 시간의 흐름은 지나온 것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어요. 하지만, 망원경과의 만남은 현재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서(과거) 오늘이 된다는 것에서 내가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과거가 규정될 수 있다고 생각의 틀이 바뀌고 있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조금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최미선=인간이 과연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인지, 아니면 완성을 해나가야 하는 존재인지라는 물음에 처할 때가 많아요. 헤세는 전자에 가까운 입장인 것 같아요. 여기서 고빈다에게 자갈의 비유를 설명하고 있어요. 관념적으로는 이해 갈 것 같지만 실제로 완벽한 현재성을 이해하긴 힘들긴 해요. 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김수복=맞아요. 미선 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관념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생각해봤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완벽한 존재임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거죠. 고빈다처럼 말이죠. 자신이 보석임을 알지 못하고 다른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죠.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이미 완벽하기에, 그 순간을, 그 현재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현재 이 모습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세계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최미선=샘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의 책인가요?


김수복=저에게 헤르만 헤세와 그의 책들이 치유의 의미이듯이 싯다르타 또한 저에게는 치유입니다. 이 책에서 싯다르타는 정말 먼 길을 돌아 자신에게로 나아갔죠. 마음과 머리가 그리 멀지 있지 않을 듯한데도 아득히 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입니다. 반면에 한없이 가까울 수도 있죠. 


최미선=현재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과정을 걷고 계신가요?


김수복=‘구도’라는 것이 어떤 형식을 갖추거나 특정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이 점도 헤세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돌아볼 때, 괴리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 ‘구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주변 상황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한 번씩 욕심과 번뇌가 불쑥 쏟아올 때, 잠시 ‘멈춤’하려고 하는 나를 느끼며,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번뇌 속에 있긴 하지만요.


최미선=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을 소개해 주세요.


김수복=두 가지 정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싯다르타가 노승이 돼서도 진리를 찾는 고빈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닐세.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며, 모든 죄는 이미 그 속에 은총을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그들 안에 노인을 품고 있고, 모든 젖먹이는 이미 그들 안에 죽음을 품고 있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네. (…) 도둑이나 노름꾼의 내면에도 부처가 있고, 브라만의 내면에도 도둑이 있는 셈이지.”


평범하게 사는 사람으로서 용기를 주는 말인 거 같아요. 내 부족한 모습까지도 나라는 것, 그런 부족한 모습이 있기에 오히려 온전해진다는 것에 위로가 됩니다.


이 문장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내가 이 돌멩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이 돌멩이가 언젠가는 이런저런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 이것이 돌멩이라는 사실, 지금 그리고 오늘 내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이 돌멩이를 사랑한다네.”


흔히 돌멩이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가능성에 가치를 부여하기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헤세는 거기에서 한 번 더 본질적으로 갑니다. 있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이죠. 숙연해지는 말이에요. 우리가 갈라치기하고, 적을 만들고, 내가 우월하다고 하는 것들이 정말 사소하게 느껴지게 하는 문장이었어요. 


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시민인문학교 교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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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선 시민인문학교 교장 최미선 시민인문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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