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북육진의 해산 군인들

배성동 시민/소설가 / 기사승인 : 2021-05-10 00: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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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

조선범 망명 보고서(4)
▲ ©문정훈 화가

 

 

권취문이 세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순사가 검문대에 앉아 있었다. 청일전쟁 이전에는 대청제국 세관원들과 왜제 세관원이 번갈아 가며 조선 세관 업무를 대리 관장하더니 이제는 승전국 왜제가 독차지했다. 통행증을 제시하자 얼굴에 콩알만 한 쥐똥점이 있는 조선인 순사보가 감청색 정복 차림의 권취문을 훑어보았다. 사무라이 칼을 찬 왜인 순사가 기세등등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칼로써 조선을 길들이려는 점령군의 살기에 권취문은 자괴감을 느꼈다. 일본인 순사가 자기네들 말로 뭐라고 하자 쥐똥 순사가 권취문의 가방을 뒤졌다. 이제 막 퇴역하는 군인에게 특별한 물품이 나올 턱이 없었다. 


“불령선인들 중에는 제대군인, 산포수들이 상당수요. 요직을 맡았던 무관은 앞으로 관찰대상이라는 걸 명심해얄 거요. 엉뚱한 작당을 하다간 경 칠 거란 그 말이야. 알았소?” 


말을 들었다 놓았다 빈정대는 말투까지 언짢았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이놈을 당장에 요절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참아야 했다. 권취문은 앞으로 닥칠 행로 역시 녹록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취문은 선박 운행 안내판이 있는 대합실로 갔다. 일주일에 두 번 운항하는 기선은 내일 오전에 있었다. 


대합실은 게다짝 끄는 왜인들 세상이었다. 길주, 신포, 청진, 두만강 라진을 드나드는 선박은 죄다 자기네식 문자로 표기됐다. 이미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침략자들은 원산 세관뿐만 아니라 기선까지 운항했다. 원산에서 길주를 왕복하는 작은 기선에서부터 자기네 본토를 드나드는 정기노선, 한 달에 한 번꼴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를 드나드는 러시아 국적의 증기선도 운항했다. 


원산 세관을 빠져나온 권취문은 부둣가를 걸어 동료들이 기다리는 여각으로 갔다. 을사늑약 전만 해도 조선 국기를 달던 선박들은 이젠 조선 국기를 내리고 일장기로 바꿨다. 기선에 달린 일장기를 본 권취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권취문은 뙤약볕에 달아오른 목덜미를 씻으려고 여각 우물부터 찾았다. 대낮부터 술상 앞에 앉은 사내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우물가까지 들렸다. 개화복 차림의 사내 둘과 흰 모시적삼을 걸친 사내가 하나였다. 일이 잘 안 풀렸는지 화딱증이 잔뜩 난 모시적삼 사내가 주발 터지는 소리를 했다. 


“나라 꼴 좋다. 한양에서는 군인이 총 들고 시가전에 나서고 자결한 참령도 있다는데, 우린 자결은 못하더라도 곡소리라도 한 번 질러야 하는 것 아닌가?” 


“방망이까지 다 반납한 처지에 무슨 얼어 죽을 곡…….”


“우리 같은 지방 순검이야 방망이 후려쳐 쥐어짤 줄만 알았지 그만한 결기가 있건데?” 


지껄이는 투정을 봐서는 개화복 사내들은 한때 거들먹거리던 퇴역 순검들로 보였다. 


“앞으론 원산 부둣가에 실업자들 넘쳐날 걸세.” 


“왜놈들이 부두마다 무역 거래를 장악했지 않는가. 보부상이라도 해보려면 보따리 풀 장터걸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온통 왜놈 세상이니…….”


“난 왜놈들 게다짝 끄는 소리만 들어도 상투가 뒤틀려. 아예 두만강 녹둔도로 가서 소금장수를 하든지 해야지 원…….”


육척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는 간 크게도 왜놈, 게다짝 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해댔다. 일진회 끄나풀이 듣는다면 크게 문초를 당할 노릇이다. 


“이보게, 자네 그러다가 나라 구할 충신 되겠어…….”


개화복 사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문 들었는가? 북청 산척들이 의병 모병을 한다더군.”


산척(山尺)이라면 산짐승 잡는 백정, 산포수들이다. 


“북청읍내가 뒤숭숭하다네. 왜놈 밑에 빌붙은 일진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색출한다네. 그 놈들이 우리 순검 때보다 더한다더군.”


우물을 퍼 올리던 권취문의 귀가 솔깃해졌다. 쥐똥 순사가 꼬치꼬치 캐묻던 연유를 알만 했다. 


“수괴는 누구라던가?”


“홍범도라더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는 그 자로군.”


“갑산 차천리 쪽에서도 모병 소문이 파다하다네.”


“차천리는 또 뭔가?”


“이 친구, 순검했다는 친구가 차천리도 모르는가. 하루에 천 리는 간다는 차도선 말일세.”


권취문은 동료들이 기다리는 뒷방으로 들어가면서 모시적삼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구릿빛 얼굴은 온통 구레나룻이었다. 


함북육진 무관 동료들이 뒷방에 모여 있었다. 전준인과 군의(軍醫) 장석회는 동기생이었고, 이기풍은 함북육진을 돌며 동고동락해온 후배다. 취기가 오르자 가슴에 담겼던 울화통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전준인이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회령 출신인 전준인은 의병에 가담한 형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 왜제 헌병대에게 적잖게 시달렸다. 탐욕스러운 벼슬아치와 나라를 팔아먹는 일진회가 집중해서 씹혔다. 급기야 전준인의 입에서는 조선 황실까지 안줏감으로 올랐다. 


“두만강 변경을 지켜온 함북육진 군인으로서 할 말 좀 해야겠네. 이 나라 황제가 통치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동안 백성의 한숨을 천명으로 받들었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일세. 난 망상의 세계에 빠져 있다고 봐. 왜냐고? 궁중의 중차대한 책무를 일개 무당에게 맡긴다는 소문이 두만강 변방부대까지 들려. 이게 될 말인가? 몇 해 전 로일전쟁만 해도 그렇다네. 우리 군 통수권자는 말일세, 로씨아 함대가 침몰하고 있는데도 로씨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무당말만 믿고 있었다네. 정말, 한심한 일 아닌가.” 


권취문은 입술에 주발이 달라붙었는지 과묵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군주를 만난 조정은 신랄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고종 황제와 친하다는 알렌조차도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악기를 타는 네로황제와 버금간다며 통치자의 무능을 비판했다. 


“부복장주(剖腹藏珠)라는 말이 있네. 조선의 배를 갈라 영혼을 빼내려는 이 섬나라 종자들은 실낱같은 조선 목숨이 사그러질 때까지, 꺼꾸러진 조선 황제 스스로가 왜제 천황 무릎 밑에 엎드려 바칠 때까지 철저히 짓밟을 걸세…….” 


권취문이 분개하는 전준인에게 술잔을 건넸다. 


“자, 술이나 들게. 그 분이 조선병대 군인이면 다 같을 걸세.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차 우리가 나아가야 할 행로네. 방금 원산 세관을 돌아보니 길목마다 왜놈 순사며 일진회 놈들이 장악하고 있더군.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권취문은 술상 가까이로 모이게 했다. 


“잘들 들게. 나랑 같이 로씨아 연추로 가지 않겠나? 앞으로 반일 성향의 조선 장교들은 왜놈 관리대상이 될 걸세. 그러니 식민지 개로 사느니보다 나을 거야.” 


“로씨아 연추라면 연해주의진 주둔지가 아닌가?” 


정석회와 이기풍 두 사람이 놀라는 눈치였다. 


“전준인 자네도?”


전준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일세, 얼마 전 연해주의진 도영장으로 계신 장형을 은밀히 만났더랬네.” 


전준인의 장형이 의병 활동을 하고 있다는 풍문은 있었지만 연해주의진의 도영장이라는 말에 눈빛들이 달라졌다.


“연해주엔 몰려든 조선인들로 생겨난 고을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네. 앞으로 로씨아에서는 미운털 박힌 청인들을 국경 너머로 쫓아낼 모양이야. 로씨아에서 청나라 넘어가는 국경을 막는 바람에 만주 약초꾼 사냥꾼들이 못 들어오고 있다네. 소만국경하면 산삼이며 웅담 호피 천국 아닌가. 호랑이 호피며, 웅담, 산삼 같은 명약도 지천이지. 아마 청나라 상인들이 떠나고 나면 벼락부자 될 조선인도 나올 걸세. 땟놈들 나간 빈자리에 일거리도 꽤 생길 거고……. 시꺼먼 화차불통이 달리는 철로 인부는 물론이고, 벌목꾼들 일감도 있다더군. 두만강 너머는 소금이 귀한 데라 소금 장사도 솔솔한가 봐. 왜 두만강 너머 녹둔도 있잖은가? 녹둔 모래밭에서 여맹이들이 구운 소금을 고을고을에 넘기는 등금쟁이도 생겨났대. 어디 그뿐인가, 해삼위에는 조선 글 신문사도 생겼다더군. 중요한 건 로일전쟁으로 사이가 안 좋은 로씨아에서 조선 독립투쟁을 전폭 지원할 모양이네.” 


뒤이어 권취문이 말을 이어받았다. 


“때를 놓치면 안 되네. 난 우선 개마고원엘 가서 봉기할 산포수들부터 접선할 걸세. 내 고향에서 포수들이 올라오고 있네. 신불산에서 활빈당 활동을 하던 지방포수들이지. 수일 내에 도착할 걸세.” 


이기풍은 권취문이 왜 개마고원 산포수들을 만나려는지 짐작이 갔다. 함북육진 진위군인이 반납한 병기들은 일본군 경비대대가 관할하는 원산 병참소에 모여졌다. 수거한 병기를 관리했던 권취문은 함북육진의 진위대가 사용했던 베르단 소총과 탄환 배치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개마고원 길을 택한 것은 지방포수들과 홍범도 산포대와 합류하려는 것이네. 그리곤 산포수를 데리고 항일부대와 합세하는 걸세. 망명지는 만주나 노령 연추로 생각하고 있네.” 


“이 사람들, 언제 그런 거사를 준비했단 말인가?” 


장석회는 비밀리에 주도해온 권취문의 대담성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도 가겠네.”


그렇잖아도 연추에서 한의를 개업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갈 궁리를 하고 있던 장석회는 이참에 합류를 결심했다. 그러나 이기풍은 망설였다. 조만간 조선인 총포 금지령이 내려질 터이고, 그렇게 되면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야 할 처지인 그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배성동 시민기자 / 소설가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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