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허위자백, 증거조작 범벅인 ‘정판사’ 재판. 이관술을 향해 놓인 덫들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2-29 00: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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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7)

‘정판사’ 재판은 1회 공판부터 방청객으로 온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면서 피로 얼룩진 채 시작됐다. 사망한 경동중학생 전해련의 추모와 장례가 이어졌고 공분은 더 크게 일었다. 변호인들의 재판장 기피 신청으로 중단된 재판은 신청이 기각된 후 1946년 8월 22일에 개정됐다. 


개정된 재판정에서 피고들은 재판장에게 다시금 피고자 합동회의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박낙종이 대표로 요구하자 1시간여 동안 피고들과 재판장 그리고 변호인 사이에 회의를 허용할지를 놓고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오전 11시경부터 피고 회의가 시작됐다.

피고 회의 결과로 이관술의 합석재판을 요구하다

피고 회의는 피고들끼리 대화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재판장이 회의 진행자의 형식으로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날 피고들은 모두 다섯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 번째는 7월 29일 검거한 50명과 사망한 중학생 1명에 대한 감사와 묵상, 두 번째는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관계자로 여겨지는 이관술의 재판 참석, 세 번째는 피고들 중 개인 행동을 할 사람은 즉각 탈퇴, 네 번째는 고문으로 위작된 사건의 전면 재조사, 다섯 번째는 피고들 사이의 악수였다. 


재판장 양원일은 첫 번째 요구 ‘묵상’과 마지막 요구 ‘악수’는 법정 내 긴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피고들은 회의 결과를 결의문으로 만들어 각 사회단체와 언론사에 보내는 것으로 정리했다.
회의 결과 중 특기할 부분은 두 번째인 ‘이관술 재판 참석’이었다. 이관술은 1회 공판부터 따로 분리돼 있었다. 같은 사건이지만 체포와 송국이 늦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피고들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자가 이관술이라고 판단했다. 미군정이 ‘정판사 사건’을 만들어 조선공산당을 압박하고 탄압하는 핵심 대상이 이관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관술을 재판에 참석시키거나 그렇지 않다면 증인으로라도 재판정에 불러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장은 그런 요구를 묵살했다. 


병합된 피고들도 한 명씩 단독으로 출정시켜 공판을 속개시켰다. 2회 공판 중 오후에 속개될 때부터 김창선만 따로 출정시킨 것이다. 김창선은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채 공판에 나왔는데 등 뒤에 혈서로 억울하다고 분노를 표출했다. “일제잔재 악질경찰 고문폐지”라는 문구였다. 3회 공판과 4회 공판 역시 김창선만 따로 불러 진행했다. 이에 김창선은 합석재판을 요구하며 묵비권을 행사한다.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는 고문을 받으며 취조를 당했으나 대중에게 공개되는 재판정에서 보다 분명히 자신의 의지를 표출했다. 그 뒤 출정한 김우용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다음 순서였던 홍계훈은 김창선과 마찬가지로 고문으로 인해 허위 자백했다고 진술했다.  

 

▲ 1946년 9월 6일 <중외신보> 고문으로 허위 자백


▲ 1946년 8월 23일 <현대일보> 피고 회의 결의문(오른쪽)과 재판정 모습

‘일제잔재 악질경찰 고문폐지’ 폭로된 경찰조사 과정


2회 공판 때 김창선이 입고 나온 옷을 뒤늦게 발견한 재판장은 엄중하게 문책하면서 셔츠를 벗기게 했다. 법정과 미군정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김창선은 뭇매에 시달리면서 그냥 묻는 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고문 수사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니 재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터트린 김창선의 폭로 외에도 공판이 계속되는 동안 모든 피고가 이구동성으로 고문 수사를 규탄했다. 기소 사실을 전면 부인하면서 고문 없는 재조사를 요구한 것이다. 


재판장은 그런 피고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구타와 물고문을 섞어 일제강점기 악질 경찰과 같은 방식으로 형사들이 취조했다는 주장을 검사에게 묻고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검사들의 취조 과정에는 고문이 없었지만 그 이전 형사들은 달랐으며, 검사가 조사를 끝낸 뒤 돌아가면 다시 억압적인 고문을 가했다고 피고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김창선을 시작으로 피고들이 줄줄이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기소된 내용이 고문에 의한 자백이란 진술이 계속돼도 재판장은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자 변호인들이 항변에 나섰다. 재판장이 성의와 아량이 없이 피고인들의 진술이 없는 상태에서 검찰 조서만 일방적으로 낭독하는 ‘죽은 재판’이라는 질타였다. 그러자 재판장 양원일은 변호사의 발언을 물고 늘어지면서 문제 삼겠다는 말로 겁박했다. 


실제로 재판이 끝난 이후 재판장은 윤학기 변호사에 대해 ‘법관 모욕’의 죄를 들어 징계재판소에 보고했다. 결국 윤학기 변호사는 징계재판에 회부돼 정직 8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게 변호인 자격이 발탁됐고 8개월 동안 변호 활동이 전면 중지된다. 재판장 기피신청이 법원에 기각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변호인에 대한 공격을 적극 용인하는 기울어진 법정이 돼버린 것이다.
 

▲ 1946년 8월 24일 <현대일보> ‘점차 드러나는 사건 전황, 고문에 못 이겨 묻는 대로 답’


공판에서 피고들의 무죄 주장 증거들이 계속 드러나다


고문 수사로 허위 자백을 받았다는 것은 공판 과정에서 피고들의 무죄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증명됐다. 먼저 김창선과 박낙종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때의 알리바이부터 제출됐다. 


김창선 등이 <해방일보> 신년호를 인쇄하는 게 바빠 위조지폐를 찍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정판사 장부에 ‘야업 특별수당’을 지급한 것을 들어 논박했다. 검사가 주장하는 1차 위조지폐 인쇄 시기인 10월 하순 박낙종이 부산과 경남을 방문한 증거도 제출됐다. 


검사는 박낙종이 머물렀다고 말한 여관 주인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했지만 <민주중보> 진주판(11월 3일), 부산판(11월 6일)에 10월 28일 경남 진주에서 강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해당 신문을 증거로 제출하면서 검사의 기소 내용을 반박한 것이다. 


7회 공판(8월 31일)에서 김우용은 김창선과 정면환이 화폐 도장판을 새겼다는 기소 내용에 대해 피고 9명 중에 그런 기술을 가진 이들이 하나도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8회 공판(9월 3일)에서는 박상근이 검사들이 주장하는 위폐 제조 기간에 다른 일들이 많아 철야작업을 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그 부분은 숙직일지와 출근 카드에 다 찍혀있다고 반박했다. 


9회 공판(9월 5일)에는 김상선이 지폐를 만드는 세밀한 인쇄에는 고급 잉크가 필요한데 정판사에는 그런 잉크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물증이 아예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회 공판에 정명환 역시 일류 기술자가 아니면 지폐 인쇄 도장판을 만들거나 할 수 없는데 김창선과 본인은 그런 기술이 없다고 항변했다. 10회 공판(9월 6일)에 나온 신광범은 박낭종이 부산 경남 방면으로 출장을 갔다가 11월이 돼서야 귀경했다고 진술했다. 11회 공판(9월 9일)에서는 송언필과 박낙종이 차례대로 나와 기소 내용을 모두 부인하면서 진술을 이어갔다. 


그중 박낙종은 검사가 이관술을 엮어 넣기 위해 허위로 만든 위조지폐 모의 과정에 대해 적극 부인하는 진술을 이어갔다. 검사가 주장하는 첫 번째 위폐 제조일, 10월 하순 27일 오전 6시 반에 김창선과 신광범이 위폐 100만 원을 박아 정판사 2층에서 이관술에게 보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사실로 검사가 주장하는 27일보다 3일이 더 빠른 24일에 이미 서울을 떠나있었다고 진술했다. 하필원과 함께 충주, 상주를 거쳐 김천에서 강연회를 했고, 28일에는 진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앞서 살핀 대로 지역 신문에 기사로 실리기까지 했으니 분명했다. 아울러 검사가 2회 제조일이라 주장하는 12월 말에는 다른 일로 철야작업이 계속됐고, 3회 제조일 2월에는 아예 야업 특근을 거절한 상태로 3주를 지속했음을 강변했다.
 

▲ 1946년 9월 5일 <현대일보> ‘목격했다는 피고 부재 반증’


증인 안순규 허위자백 폭로로 큰 파문, 이관술은 21회 공판부터

12회 공판부터 20회까지는 증거물에 대한 조사와 증인들을 불러 신문하는 것으로 지속됐다. 12회, 13회는 증거와 증인 요청 목록에 대한 조사로 진행됐는데 검사와 변호사 측 모두 필요 사항을 요청했다. 변호사 측은 관련한 15건에 이르는 추가조사를 신청했다. 


14회부터 시작된 증인 심문에는 미군정 관련 인물부터 출석했다. 경무부장 매글린, 통역장교 윙스소령, CIC 수사관 칼린, 사법부 연락장교 맥마흔 등이다. 15회 공판에 정판사 공장장인 안순규가 증인으로 나왔는데 그는 검사 측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증인이었다. 


안순규는 박낙종 등이 위조지폐를 인쇄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재판정에 나와 자신이 경찰과 검사에게 밝힌 진술이 모두 허위였음을 고백했다. 경찰의 압박 때문에 고문을 받는 게 두려웠다는 것이 허위 자백한 이유였다. 이날의 증인 심문은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목격 진술이 없다면 기소한 내용에 큰 허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순규는 위증죄로 별도의 재판에 넘겨진다. 그렇게 증인 심문 과정이 검사와 재판부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태에서 19회까지 진행됐고 안순규에 대한 위증죄 공판이 10월 15일에 열리게 된다. 안순규의 위증죄 재판이 시작된 상태에서 이관술에 대한 공판이 이어졌다. 


이관술은 21회부터 23회 공판까지 단독심리로 공판이 진행됐다. 공판에 나선 이관술은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정의 열기는 다시 크게 고조됐다. 검사와 판사 그리고 미군정 전체가 노리고 있었던 가장 큰 인물에 대한 공판이었기 때문이다. 

 

▲ 1946년 9월 6일 <현대일보> ‘정판사엔 위폐용 잉크 없다’

 

▲ 1946년 9월 15일 <동아일보> ‘정판사 현장을 검증’

 

▲ 1946년 10월 18일 <자유신문> 이관술 재판 개시 ‘공판 받을 이유 없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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