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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 이관술 평전]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을 멈췄고, 국군의 지연 작전은 대전 아래까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 한강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다리는 모두 다섯 개였다. 세 곳은 기차가 지나는 철교였고 나머지 두 곳이 사람과 차량이 건널 수 있는 한강대교(인도교)와 광진교였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부터 시작된 한강 다리 폭파는 새벽 4시 광진교로 마무리된다.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불발돼 다시 폭파를 시도했는데 절단
<기획>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 함락, 김삼룡과 이주하는 개전 다음 날 처형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 인민군은 빠르게 38선을 넘어 남진했다. 치밀하게 남침을 준비해왔던 북한에 비교해보면 남한은 북한군의 동향파악부터 허술했다.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이어 조만식과 김삼룡‧이주하에 대한 상호교환 같은 여론 공방 아래 국군의 혼선과 태만이 깔려있었다. 당시 국군은 38선에서 꾸준히 지속했던 국지전을 대비해 내렸
[기획] 남과 북으로 흩어진 이관술의 항일혁명 동지들,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7)
1948년 4월 30일 전조선 민주주의정단 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남북대표자연석회의)가 끝난 후 김구와 김규식은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북에 남은 대표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헌, 홍명희, 김원봉, 백남운, 이승엽이다.허헌은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했고, 여러 사회단체 단체 대표를 맡아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이였다. 18
[기획] 1948년 4월 30일, 평양에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공동성명 발표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한 ‘전조선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30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렸다. 김구가 38선을 거쳐 평양으로 향한 4월 19일 오전에 이미 예비회담이 열린 상태였다. 본회의는 오후 6시에 열려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다가 김구의 방북 소식을 듣고 휴회한다. 첫날 채택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 갇힌 동안 벌어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충돌
이관술이 갇힌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10월 19일 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에 ‘대전감옥’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대전형무소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23년이다. 지금은 원래 자리는 모두 철거된 상태로 1984년 3월 20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했다. 대전형무소는 원래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형자들을 수감해오다, 3
정판사사건 조작, 여운형 암살, 반민특위 테러를 주도한 ‘악인 노덕술’
1947년 7월 19일에 벌어진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은 남조선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해방 이후 이미 10여 차례에 걸쳐 암살과 테러 위협을 겪었던 여운형은 사건 당일 명륜동에 있는 은신처에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여운형은 그날 IOC 회원국이 된 것을 기념해 열린 영국과 친선 축구경기가 열려 참관할 계획이었다.
대전형무소 수감 중 ‘반곡초등학교’ 건립에 땅을 기부한 이관술
1947년 4월 24~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어난 소요 사건은 교도관들의 구타로 진압됐다. 그 과정에서 수형자 중 스무 명 가까이 징벌방에 갇히는 등 격리처분을 받았다. 이관술은 조용히 단식하면서 형무소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면 미군정 법무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정판사 사건 수형자들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잡
이관술 서울 형무소에서 대전 형무소로 이감, 옥중 생활
정판사 사건은 1947년 4월 11일 대법원에서 상고심 요청에 대해 ‘재심리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법적으로는 더 이상 진행할 여지가 사라졌다. 결국 정판사 사건 재판은 조작과 은폐 그리고 왜곡으로 범벅이 됐던 1심 판결 그대로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변호인단은 4월 15일 공식 성명을 발표하면서 사법기관의 부당한 판결에 대해 강하
이관술이 가장 먼저 최후진술, 그러나 짜인 각본대로 무기징역 선고
이른바 ‘정판사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사실 심리와 변호인단의 변론이 모두 끝난 뒤 10월 26일에 열린 27회 공판부터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시작됐다. 오전 10시 35분부터 제4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개정 시간 30분 전부터 모든 피고가 법정으로 들어섰다.이 날 가장 먼저 법정에서 최후 발언을 시작한 이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이 발언한 내용은 당시 공판
10월 항쟁이 무력 진압 되고, 정판사 재판은 검찰의 조작 명백
10월 항쟁 시작은 ‘쌀 투쟁’과 경찰 발포로 사망한 노동자미군정 통치과정에서 첫 대규모 항쟁은 10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터졌다. 그런데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전환과 함께 시작된 전평 총파업이 물결을 따라 일렁거리는 정도였다. 아침 일찍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 주위에 노동자 수천 명과 부녀자, 어린이 등 1000여 명이 “먹을
이관술을 사슬에 채운 때 벌어진 9월 총파업과 박헌영 월북
미군정 탄압에 조선공산당은 ‘신전술’로 노선 변화‘정판사 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전면 탄압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전면 선전을 시작으로 경찰과 우익단체를 총동원해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그동안 미군정이 벌였던 정책들, 특히 194
“절대로 현장을 본 적이 없소” 안순규 양심고백 위증재판과 이관술 출석 공판
이관술은 1946년 7월 6일 서점 앞에서 경찰에 체포된 뒤 수사를 받고 8월 12일 검사국으로 송국됐다. 정식 기소 날짜는 8월 21일이었지만, ‘정판사 사건’ 재판이 열린 이후 다른 피고들과 분리돼 있었다. 그렇게 이관술은 두 달 가까이 기소 상태로 수감된 채 감옥에서 재판 진행 소식만 정해들을 뿐이었다. 피고인들은 지속적으로 이관술 합석재판을 요구했
고문, 허위자백, 증거조작 범벅인 ‘정판사’ 재판. 이관술을 향해 놓인 덫들
‘정판사’ 재판은 1회 공판부터 방청객으로 온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면서 피로 얼룩진 채 시작됐다. 사망한 경동중학생 전해련의 추모와 장례가 이어졌고 공분은 더 크게 일었다. 변호인들의 재판장 기피 신청으로 중단된 재판은 신청이 기각된 후 1946년 8월 22일에 개정됐다.개정된 재판정에서 피고들은 재판장에게 다시금 피고자 합동회의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빗발치는 이관술 누명 탄원, ‘정판사 사건’ 첫 공판은 졸속에 아수라장
이관술이 체포돼 구속되고 재판을 받기까지 항일 혁명투사로 살아왔던 삶을 역설하고, 누명을 썼다는 해명 지지 글들이 터져 나왔다. <현대일보>는 7월 10일에 발행한 신문에 ‘조국해방에 바친 그의 투쟁반생’이란 장문의 글을 실어 이관술의 억울함을 조명했다. 더불어 이관술의 동덕여보 교사시절 제자인 박진홍의 투고 글을 내서 거짓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
미군정 조작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주범이란 누명을 쓴 이관술
미소공위와 미군정의 좌익 약화, 평정 기도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설정한 목표는 확고했다.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좌익을 공격하고 우익을 앞장세우는 것이다. 남북한 강제 분단을 넘어 단일한 친미 정권을 세울 수 없다면, 남한에 한정하더라도 관철할 목표였다.이를 위해 1945년 말부터 시작해 해를 넘겨 번져갔던 ‘신탁통치 찬반 분열’에서 실제 미국이 노렸던 장기
‘신탁통치’ 논쟁으로 갈라지는 정세 속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로 점화된 ‘탁치 분쟁’은 미·소 합의로 강제로 그어진 해방정국을 들끓게 했다. 그리고 남과 북으로 나뉜 현실이 아예 고착화할 수 있다는 위험한 경고음을 울렸다. 이제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흐름은 어려워졌다. 특히 건국동맹에서 인민공화국 그리고 중앙인민위원회로 이어진 사회주의 계열 정당(조선공산당, 조선
이관술과 손응교의 오래되고 깊은 인연…손응교가 기억해 준 이관술
1946년 1월, 이관술이 심산 김창숙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무거운 마음만 가득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에서 교사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때부터 항일혁명운동의 전선에서 함께 한 민족주의계열을 존중해왔다. 해방 후 현대일보에 기고했던 회상기에서 동덕여고보 시절을 회고할 때도 동료 교사 신명균을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
신탁통치 찬반 논란 속에서 심산 김창숙을 만났던 이관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악의적인 오보(1945.12.27) 이후 해방정국은 찬반 논란으로 크게 달아올랐다. 그 과정에 반대 입장으로 제일 앞장선 것은 국내로 귀환한 임시정부였다. 김구를 비롯해 임시정부 참가자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인민위원회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모스크바 3상회의 후 신탁통치 논란…미군정 하지를 만난 이관술
1945년 12월이 되자 해외에 있던 세력이 대부분 귀국하면서 해방정국은 보다 복잡하게 변화했다. 잡지 <선구>의 정치여론조사에도 나오듯 선호하는 지도자와 지지세력이 나뉘기 시작했다. 여운형, 박헌영, 이관술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 그리고 임시정부의 귀환과 함께 국내에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 김구로 나뉘었다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양심적인 정치 지도자 5위로 뽑혀
미군정의 허가 아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는 굴욕을 겪었지만 임시정부의 귀환으로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대부분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경합을 벌이게 된다. 해방정국은 지난 3개월 동안 건국준비위원회를 바탕에 둔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앞장서 친일파와 부역자들이 보호막을 만든 한민당, 미군정을 등에 업고 독립촉성회란 정치기반을 만든
해방공간 가파른 정치세력 변화 그리고 임시정부의 귀환
이승만의 귀국을 기점으로 해방정국 속 정치판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해방 직후 가장 빠르게 움직였던 사회주의 계열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로 나아가면서 여론을 선점했지만 미군정이 도착하자 민족주의 계열과 친일파, 부역자들이 들썩거렸다. 그들은 1945년 9월 16일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을 만들어 결집한다. 한민당은 정치이념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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