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를 풀며-기억과 기록의 관계

황은혜 기억과 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01-06 00: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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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무슨 돈이지?”


하와이 이민 2세대로 지금은 80세가 훨씬 넘은 한 할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인색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많은 돈을 가지고 와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놓곤 했는데 어린 그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를 한참 먹고서야 하와이 교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진 돈에 대한 의문도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는 독립 의연금을 모으고 보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예준 씨는 미군기지의 세탁소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랜 시간 많은 돈을 냈다. 그들이 낸 자금은 금전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임시정부를 도왔고, 김구는 그 돈을 기반으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 같은 청년들을 키워냈다.

“영수증이 많네~ 돈도 많이 내셨어. 돈 다 내고 뭐 잡수고 사셨는지 모르겠어.”


1900년대 사탕수수농장 급여는 한 달에 15불(현재 가치로 약 380달러), 그중 절반이나 되는 돈을 독립 의연금(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낸 여성 노동자, 그가 남긴 유품에는 대한민국 독립 의연금 증서가 수두룩하다. 며느리가 집을 팔고 이사 가면서 두고 갔다는 시어머니의 짐 더미 속에는 약 100여 년 전의 빛바랜 사진과 기록들이 뒹굴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자긍심이자 치열한 삶의 흔적이었던 이 증서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 것일까? 기록은 있었지만, 기억은 없었고 기억이 없는 기록은 무의미해졌다. 기억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독립 의연금을 내면서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귀향하지 않았을까? 하와이 이민 사회는 당시 두 갈래로 분열돼 있었다.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박용만 계열의 국민회가 그것이다. 두 단체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것에서는 뜻이 같았으나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승만은 독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과 외교를 통한 것이라 믿었던 반면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두 단체의 이견은 전혀 좁혀지지 못했고,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이 갈등은 독립 후에도 계속됐던 것 같다. 남은 사람들은 당시 교민 중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누군가 안다는 것 그게 중요하죠, 잊히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하와이 이민 2세대, 1920~30년대 태생으로 지금 80세를 훌쩍 넘긴 그들은 오하우섬 중부에 자리한 작은 마을 와이하와, 그곳에 있는 한인 교회 건너편 건물에서 함께 살고 자랐다. 교회는 놀이터이자 학교였고, 조국의 소식을 나누는 사랑방이었다고 한다.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자주 못 보았던 부모님들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어른 남자들이 교회 앞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정치토론을 하며 소주를 마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나무 아래에는 아마도 김구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 의연금을 모으는 사람, 기꺼이 그 돈을 냈던 사람, 어쩌면 그 소식을 일본 외무성에 전하는 한국인 밀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는 <백범일지>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면, 그들과 나눈 편지가 없었다면 사라져버렸을 기억들이다.

월급의 반을 기부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던 할머니가 사라지자, 그 증서들의 의미도 함께 사라졌다. 지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상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왜 그랬는지 늙은 아들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이 없는 기록은 찾는 이가 없고, 기록이 없는 기억은 이어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라도 끊임없이 기록을 찾아내고, 남아있는 기억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황은혜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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