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고장 병영 한 바퀴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9-16 0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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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향토사 답사 교실 5강

 

태종 17(1417)년 기박산성에 있던 좌병영(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은 지금 병영성 자리로 옮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군관 399명과 수성군 40명이 배치됐다. 내황포, 개운포, 염포, 서생포 방어를 담당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크게 훼손됐다. 왜군은 울산왜성(증성, 도산성, 현 학성공원)을 만들면서 병영성과 울산읍성의 석재를 가져다 썼다. 파괴된 병영성은 영조 이전 재건됐고 서문과 북문에 옹성을 만들었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되면서 병영성에 주둔했던 부대도 사라졌다. 내아와 객사 등 관사 건물도 주인을 잃었다. 그 자리에 현재 병영초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옛 일신학교(현 병영초)가 만들어졌다.


병영초등학교 앞에는 “토포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아가라”는 글귀를 새긴 하마비가 서 있다. 원래 병영성 남문 들머리에 있던 걸 옮겼다. 하마비 앞에 말을 묶어놓고 기다리던 하인들이 서로의 상전을 품평하던 데서 ‘하마평’이란 말이 나왔다.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일신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가장해 모였다가 차올린 축구공을 신호로 만세를 외치며 학교 교문을 나와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100여 명. 행진 대오는 불어나 거리를 가득 메웠고, 면사무소, 병영주재소, 동리, 남욀, 신전리를 두 바퀴 돌았다. 무력 진압으로 양석룡, 이종욱, 이종룡 등 14명이 체포됐다. 이튿날 오후 3시 만세시위가 다시 벌어졌다.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수천 명이 병영주재소를 향해 행진했다. 일본경찰의 발포로 김응룡, 문성호, 엄준, 주사문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출감한 의사들은 순국열사 4인의 위패를 무룡산 옥천암에 봉안하고 매년 4월 6일 비밀리에 추모제를 거행해오다 해방 뒤 삼일사에 옮겼다. 삼일사는 1955년 병마절도사영의 부속건물 가운데 하나를 영모각으로 개수해 사용하다 삼일사로 이름을 바꿨다. 1971년 별림산(베름산)으로 옮겼다가 1987년 현 병영초등학교 옆으로 새롭게 조성해 다시 돌아왔다. 만세문 앞 충혼비는 병영 출신 한글학자 최현배가 직접 글을 지었다. 


외솔 최현배는 1894년 경상남도 울산 하상면 동리(중구 병영)에서 태어났다.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으로 상경해 경성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을 처음 만나 한글과 말본을 배웠다. 22세 때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교토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 1927년 한글사를 조직하고 1931년 조선어학회를 창립했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교수직에서 파면 당했다. 1941년 복직해 도서관 일을 담당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해방 뒤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재직했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문과대 학장과 부총장을 지내고 1961년 정년퇴임했다. 2010년 개관한 외솔기념관 2층에 생가가 복원돼 있다. 1950년 최현배는 국회의원선거 울산을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2위 득표에 그쳐 낙선했다. 1960년에는 울산보도연맹 희생자합동묘의 추모비(6.25 사변 당시 원사자 합동묘비) 글을 직접 적었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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