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의 머리가 묻힌 관림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1-16 08: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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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머리는 낙양을 베개 삼고, 몸은 담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가다

신야의 유비가 융중의 제갈량을 찾아 갔을 때 이에 감격한 제갈공명은 ‘융중대책’을 꺼내 놓는다. 제갈량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는 사실상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최대의 적인 북방을 차지하고 있는 조조를 넘어서야겠지만 현격한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먼저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계책이었다.

유비-손권 연합으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대전’에서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진 후 공고했던 유비-손권 연합은 점차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비는 주인 없는 땅이 되어버린 형주(호북성, 호남성 전 지역과 하남성, 귀주성, 광서성, 광동성 일부 지역)를 자기 것이라 주장했고, 손권은 적벽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유가 거느리는 수군의 공이 크므로 당연히 승전의 성과는 동오가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한편 이 와중에 유비는 방통의 계책대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촉군에 들어갔다. 유비는 유장을 공략하고 성도에 입성해 익주를 차지하게 된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가 익주까지 점령한 마당에 형주까지 내주는 것은 자신의 집 안마당을 적에게 내주는 꼴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비와 손권 사이에 형주를 놓고 한 판 승부가 벌어진다. 당시 유비의 형주 경영의 중심지는 강릉에 있었고, 손권은 육구였으며 북상하는 유비의 군대를 방어하기 위한 조조의 남방 전선 기지는 번성에 두었다.

형주를 지키고 있던 관우는 동쪽의 손권과 북쪽의 조조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219년 관우는 번성을 공략하기 위해 강릉에서 북상했다. 그러나 육구에는 동오의 명장 여몽이 지키고 있어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를 전원 동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개전 초기에는 관우의 활약으로 번성 하나만 남겨놓고 형주 일대 전역을 석권하며 기세를 높였다. 번성만 함락하면 바로 중원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조조도 관우의 북상에 위기감을 느껴 수도 허창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의 “유비와 손권은 표면적으로 친한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시기하고 있습니다. 손권에게 사자를 보내 함께 관우를 치자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번성의 포위망은 절로 풀어질 것입니다”는 진언에 따라 조조는 강남을 떼어주겠다는 조건으로 손권과 화친을 맺고 관우의 배후를 칠 것을 종용했다.

관우가 한참 번성 공략에 열을 올리는 시점에 손권은 육구의 사령관으로 당시까지 무명에 지나지 않았던 육손으로 교체한다. 여몽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풋내기에 듣보잡인 육손이 사령관으로 부임을 하자 마음을 놓은 관우는 안심하고 강릉에 주둔하던 나머지 병사들을 번성 공략에 투입한다.

손권의 계략은 적중했다. 강릉이 비었다는 첩보를 듣자 손권은 즉시 여몽을 육구 사령관으로 재기용해 손쉽게 강릉을 점령한다. 강릉이 탈취되었다는 소식과, 위와 동오의 협공을 받게 된 관우는 급히 퇴각하여 담양의 맥성에 주둔하게 된다. 포위망이 좁혀들자 관우는 맥성을 탈출하려 했지만 여몽의 군사들에게 퇴로마저 차단돼 마침내 포로가 되고 만다. 관우의 목이 베어졌고 그 머리는 낙양의 조조에게 보내진다. 비록 관우가 적이긴 하지만 그에게 지극 정성으로 호의를 품었던 조조는 침향목으로 관우의 몸통을 만든 뒤 제후의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이때가 219년 12월 이었다. 220년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가 승계하자 나라 이름을 위나라로 바꾸고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한편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는 수훈을 세운 동오의 명장 여몽은 42세의 나이로 죽는다. 사람들은 여몽의 죽음이 관우의 영혼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형주 쟁탈전에서 동호의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손호마저 얼마 후 석연치 않게 죽음을 맞게 되자 삼국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 사이에 관우의 죽음에 대한 동정심이 확대된다. 낙양에 관우의 머리만 모신 관제묘가 세워진 배경이다.

관우의 죽음에 대한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관우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의했을 때 관우는 크게 노하여 “호장의 여식을 어찌 개의 자식에게 시집보내겠는가?”하며 손권의 사자를 꾸짖고 창피를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또 관우는 장비, 조자룡, 마초, 황충과 함께 촉나라의 오호 대장군에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비는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고, 조자룡은 서촉 정벌에 공훈을 세웠으며, 마초는 대대로 명문세가 출신으로 명성이 드높으나” 노병에 불과한 황충이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인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종종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는 자신의 단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논평했다.

중국 역사상 무덤에 ‘림’이라는 말이 적용된 사람은 공자와 관우 두 명뿐이다. 그들이 일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관우의 머리가 묻힌 ‘관림’을 찾아갔다. 관림은 낙양의 동남쪽에 있다. 관림 대문 앞에는 한백옥으로 명나라 때 만들어진 돌사자 한 쌍이 묵묵히 이방인을 맞이한다. 대문 양쪽 담장에는 각각 충, 의, 인, 용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대문을 지나 다음 문인 ‘의문’ 앞에 서자 ‘위양육합’이라는 편액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청나라 서태후의 친필이다. ‘관우의 위세가 천하에 드날린다’는 뜻이리라. 의문의 양쪽 벽에는 송나라의 충신이자 장수인 악비 장군이 그린 ‘관성제군상’과 관우가 댓잎 모양으로 글자를 표현한 ‘관제시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박물관으로 이전해 놓았는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관제시죽
관우

불사동군의        동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으니
단청독립명        선명한 빛깔로 홀로 이름을 세우리
막혐고엽담        외로운 잎 초라하다고 하지 말지니
종구부조령        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

여기서 동군은 조조를 지칭한 것이다. 또 대나무는 관우 자신을 빗댄 것이다. 관우가 유비의 생사를 모른 채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던 시절,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자 조조를 떠나면서 남긴 시다.

관제시죽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을 지니며 의문을 나서자 돌사자가 조각된 기둥이 좌우로 나열된 ‘용도’가 나온다. 이어서 ‘배전’이 나오고 ‘대전’이 나온다. 배전 한쪽 벽에는 3.5m 높이의 청룡언월도가 세워져 있다. 미안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청룡언월도와 같은 무기가 없었다. 대전에는 도교의 신으로 떠받들여진 관우가 용포를 입고 있다. 대전을 지나 ‘이전’에는 ‘광소일월’이라는 편액이 나온다. 청나라 광서제가 썼다. 이곳에서는 상인들의 수호신인 관우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삼전’에는 갑옷을 입은 채 <춘추>를 읽고 있는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관우의 진짜 모습과 가장 어울린다.

삼전을 지나자 관우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 패방에는 ‘한수정후묘’라고 쓰여 있다. 한수정후란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한의 헌제에게 청해 관우에게 내려진 작위다. 관우도 이 작위만큼은 평생 긍지를 지녔었다. ‘한수정후묘’ 패방 뒤로는 ‘중앙완재’라고 새겨진 패방이 또 나온다. ‘중앙은 머리를 뜻하고 완재는 여전히 있다’는 뜻이다. 관우의 머리가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의미이리라. 관우는 ‘머리는 낙양을 베개 삼고, 몸은 담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관우의 고향인 산시성 원청’에서 편히 잠들어 있으리라.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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