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낸다는 것, 귀로 듣는다는 것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20-01-08 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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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자연 이야기
▲ 겨울철에 비가 와서 촉촉해지자 직박구리가 전 울산초등학교 회화나무 가지에 잔뜩 앉아 재잘거리다가 건너편 한옥 주자창 소나무로 날아갔다. 이런 자연의 소리가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진다는 것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사람 얼굴의 기관을 말할 때 ‘이목구비’ 순으로 말한다. 말하기 쉬운 순서를 택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는 예전부터 선조들이 중하게 여긴 기관의 순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몸이 만 냥이면 눈이 구천 냥’이란 말도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귀가 가진 일상의 영역도 있지만 한 차원 높은 영성의 영역을 보지 않았나 싶다.


사람의 귀는 발생학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데 태아는 수정된 지 며칠 안에, 겨우 0.9mm에 불과할 때, 벌써 초보적인 귀를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넉 달 만에 달팽이관까지 거의 완전한 크기로 성장한다고 한다. 청소년기까지 계속 성장해가는 다른 기관과는 달리 귀를 가장 빠른 시기에 완성한다는 것은 귀가 진화학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뱃속 태아는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게 먼저 이뤄지기에 태교에 많이 신경 쓰게 됐던 것이다.

티베트인들에게 부여된 자연환경은 한시도 신을 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눈과 바람, 산사태와 홍수로 마을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고 밤이 되면 하얀 여우와 표범이 나타나 양과 야크를 데려갔다. 이 뿐만 아니다. 척박한 환경에 먹을 만한 것은 별로 없고 날씨는 사나웠다. 병이 들면 약도 구하기 어려워 모든 것은 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도에서 건너온 초기 불교는 티벳인들에게는 절박한 신앙이면서 일상생활이 됐다.

중국이 달라이 라마가 있는 티베트 성지 제뿡사원을 점령하고, 중국에서 한족 간부를 파견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중국으로 망명했고 700여 명의 라마승은 성하의 귀환을 소망하는 진언(眞言)과 노래를 불렀다. 중국은 사원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인을 배치하고 불경낭송을 금했다. 그러자 사원에 있던 수행자들이 점차 이상해졌다. 수행자들은 얼이 빠져 창문 밖 하늘만 쳐다보거나 사원의 기둥을 붙잡고 울기까지 했다. 사원에는 죽음과 음울한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졌다. 몇 년 뒤 새로 온 책임자는 심각성을 알고는 불경낭송을 허락했다. 그러자 그들은 한 달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경전을 낭송했고 그 소리는 사원의 담장을 넘어 라싸에 울려 퍼졌다. 그들에게는 여럿이 모여 낭송하고 소리를 듣는 것이 ‘밥’과 ‘잠’보다 더 소중한 일이었다.

사람이 만나 서로 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귀로 듣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처럼 인간에게 더 소중한 행위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음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한 사람이 내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 어떤 오장육부와 뼈를 갖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목소리나 노래, 낭송이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몸과 정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들리는 음색이 상대의 호감, 비호감을 결정하는 데 큰 구실을 한다.

또한 귀는 눈과 입, 코와는 달리 내가 의지로 닫을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코마저도 악취가 나면 잠시 숨을 참으면서 조절이 가능하지만 귀는 항상 무방비로 열려 있다. 그래서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으스대는 자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 뜻(영혼)과 소통하려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잘되지 않으면 남 말을 듣기가 가장 힘들다.  남의 말이 불편하고 소통이 안 돼 끊임없이 자기 내부로만 들어가는 순간 그 사람 영혼은 생기를 잃고 병들어 간다.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생사를 오갈 때도 사람의 귀는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는 기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병환으로 오래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에게도 말조심을 당부하는 것이다. 중환자실 혼수상태였던 형의 귀에 이별의 말을 했을 때 형은 알아 들었다는 듯 눈가가 촉촉해졌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원의 라마승(깨달은 고승)을 초빙해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치른다. 이때 라마승을 죽은 자의 귀를 씻는 의식을 하고는 귀에 대고 진언을 들려준다. 이 의식은 바로 죽음을 다룬 경전 <바로드 퇴돌(Bardo Thoedol)> 즉 우리에게 익숙한 제목 <티베트 사자의 서>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드(Bardo)는 둘(do)-사이(Bar)란 뜻이고 퇴돌(Thoedol)은 ‘듣는 것을 통해(thos)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gdol)’라는 뜻이라고 한다. 49일 동안 죽은 몸을 떠난 영혼도 영계(靈界)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라는 것을 <티베트 사자의 서>는 전하고 있다.

마을에서 임종의 소식이 들리면 사원의 라마승은 준비한 진언을 망자의 귀에 대고 읽어주는 의식을 여러 날 한다. 의식이 끝나면 풍습대로 조장(鳥葬)을 치른다. 조장을 치르는 의식은 자연 속에서 이뤄진다. 망자에게 악기를 연주해 주며 꽃과 나무를 스치는 바람의 소리를 듣게 하고 새소리를 듣게 한다. 영계에서도 망자에게 진언을 귀로 들려줘 더 나은 곳으로 환생하길 기원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영속성은 ‘귀로 듣는 소리와 그것에 의한 의식의 각성’에 있다는 것을 티베트 라마승들은 가르쳐주고 있다. 상대에게 들려주는 각자의 소리는 어때야 할까? 악플의 문자도 결국 귀에 거슬리는 것이지 않을까?

주: 이 글은 <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궁리) 책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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